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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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5.08.1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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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천 (진해경찰서 경무계장 )
백승천
입추가 이미 지났건만 절기를 비웃듯 폭염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는 8월의 주말이었다. 그놈의 더위 서슬에 눌려 바깥출입은 엄두도 못 내고 ‘역시 더울 땐 방캉스가 최고’라며 방바닥만 긁다 뉘엿뉘엿 해거름이 비치니 그것도 슬 지루해진다. “어디 가볼까?” 집사람과 서로 눈치를 살피다 챙겨 나선 게 ‘밀양 연극촌’. 막상 도착해서 놀란 건 연극촌보다 그 옆 넓게 펼쳐진 2만평이 넘는 화사한 연꽃 밭이었다. 한여름 뙤약볕에 지친 듯 봉오리를 한껏 움츠리고 있는 게 조금 아쉬워도 그런들 어떠랴. 뜻하지 않은 즐길거리 하나 만난 것을 흡족해하며 둘러보니 해 저물녘 그 모습도 나름 멋있다.

애들은 연꽃 사잇길을 뛰놀며 개구리 쫓느라 정신이 없고, 마음 같아선 탐스러운 꽃 한 송이 꺾어다 ‘여보, 당신 아름답구려!’ 닭살 멘트와 잘 섞어 집사람 손에 건네주고 싶다만 그래선 안 될 일, 연(蓮) 바다 한가운데 정자에 앉아 그윽한 향에 취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호사다. 그러고 보니 그간 몇 번 본 적도 없는 게 이리도 정감 가는 건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눈에 띄는 연등 때문일까. 바람결에 출렁이는 연분홍 꽃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왜 ‘불가의 꽃’이라 불리는지 생각해 보았다. 진흙탕 속에서도 그 잎과 꽃이 더러움에 물드는 법 없고, 그 속의 더러운 냄새도 향기로 가득 채우는 꽃…. ‘그렇군. 속세에서 사회의 악(惡)을 정화하는 경찰과 닮은 존재네.’

봄·가을 좋은 철만 골라 피는 여느 꽃들과 달리 한더위 아래도 마다않고 피는 것도 경찰모습을 빼닮은 것 같아 한편으론 축 처진 봉오리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이곳은 지자체 지원으로 농가의 전답을 임대해 조성했단다. 겉만 번지르르한 다른 축제들에 비하면 농가·사업자 모두의 수익은 물론 농촌 환경을 잘 살린 좋은 모델이고 톡톡히 효자노릇하는 연이다. 속세의 사람들이 연과 같다면 세상살이에 더러운 냄새가 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이 미치고 나니 아서라, 그러면 나는 실업자밖에 더 되냐. 계획치 않았던 행차 탓에 정작 연극 한편 못 보고 집사람 눈총에 연 막걸리 한잔 들이켜지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연(蓮)의 매력에 푹 빠졌던 이날 나들이는 더위에 지친 우리 가족의 심신을 식혀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백승천 (진해경찰서 경무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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