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
유비무환
  • 경남일보
  • 승인 2015.08.25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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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천 (진해경찰서 경무계장 )
백승천 
조선의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서애 유성룡 선생은 임진왜란 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낙향하여 집필한 ‘징비록(懲毖錄)’에서 전쟁의 발단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왜(倭)의 침략을 예견한 율곡 이이 등 서인들의 10만 양병 주장에 따라 선조는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을 함께 통신사로 보내 일본의 정세를 염탐케 한 바, 황윤길은 “왜가 곧 침략할 것이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며 양병을 간청한 반면,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동인들과 이에 동조한 나는 “괜히 백성을 불안케 한다”며 반대하여 선조가 우리의 뜻에 따름으로써 귀중한 10만 양병의 기회를 놓치고 결국 이듬해 조선은 왜침을 당하게 된다.’

이런 선조에 반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첩자들 외에도 삼포 각지에 거주하던 왜상들로부터도 미리 보고 받고는 승전의 확신을 가지고 마침내 ‘정명가도(征明假道·명나라를 치려니 길을 빌려라)’란 명분을 내세워 조선침략을 결심한다.

방계혈통이라 입지가 약했던 선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쟁을 이용했을 법도 하지만 어쨌건 선조의 그릇된 판단으로 조선은 노량해전까지 장장 7년간에 걸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는데, 국가 최고 권력자인 두 사람의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준비성은 사뭇 다르다.

‘징비록’이 후세에게 전하고자 하는 건 말 그대로 ‘징비(懲毖·지난날의 잘못을 미리 경계하여 후환을 없앤다)’, 즉 ‘유비무환’일 것이다. 당시 선조가 왜국(倭國)의 정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10만 양병을 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며칠 전 북한의 포격도발과 연이은 선전포고로 온 나라에 전운의 공포가 감돌았다. 이런 와중에 일부 병사는 후배들과 함께 전장으로 달려가기 위해 스스로 전역도 미뤘다니 참으로 감동적이다. 평안할 때 위태로운 때를 생각하여 언제나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일이 없다.

유비무환, 나랏일에만 필요하겠는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사달이 나기 전에 미리 준비한다면 대소사(大小事)간에 그리 근심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백승천 (진해경찰서 경무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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