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잘가라, 이 여름
[경일칼럼]잘가라, 이 여름
  • 경남일보
  • 승인 2015.08.2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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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숙자 (시인)
마당에는 꽃보다 더 무성하게 풀이 자라고 온종일 풀 뽑기를 해도 돌아서면 또 풀이 자리하는 계절을 힘겹게 지난다. 다실 앞의 모과나무에는 지난 태풍에도 살아남은 모과가 열두어개 달려 있고, 속수무책 붉어가는 대추나무와 텃밭의 고추, 꽃대를 올린 부추는 별처럼 하얀꽃을 달았다. 멀리 산언덕을 바라보면 어느새 놀놀해져 가는 산색이 달라졌다고 소설 쓰는 박 선생님은 시골집 풍경을 알려 오신다. 지난 여름의 기억들은 어떤 모습으로든 흔적을 남길 것이다.

염천 폭염 속에서 강따라 난 길을 따라 문학기행을 두어번 다녀오고, 문학관 서늘한 소나무 숲속 뜰에 작가의 혼불로 핀 고즈넉한 흰 옥잠화의 기억은 오래갈 것이다. 소살소살 정자에 지친 영혼을 잠시 부리니 비로소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영감을 얻고 치열함을 배우고 여행이 가져다 주는 충만한 자양분을 만끽하는 여정이다. 치열한 작가정신과 혼신의 힘을 바친 작품은 어떻게든 결실을 가져다 주게 되어 있는 것. 누군가 평생을 통해 이룩한 업적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연례행사로 전국의 문학관을 많이 돌아보았다. 진주에는 김정희 시조시인이 사재로 지은 전국 최초의 시조문학관이 새벼리 언덕배기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시조의 텃밭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매화꽃 필 무렵에는 시화전을 열기도 하고 시조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고군분투 애를 많이 쓰고 계신다. 홍보와 지원의 손길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한편으로는 아직 진주권 문학을 기릴 수 있는 문학관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 파성 설창수, 동기 이경순, 아천 최재호. 운초 박재두 등 작고하신 문인들의 자료관이 생겨 부디 귀중한 문학자료들이 더 이상 소실되고 훼손되기 전에 관심을 가지고 추진되길 바란다. 인근 주변지역의 몇몇 문학관을 보더라도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상당하고 동시에 문학이 지역문화에 기여하는 인프라는 대단하다고 본다. 하루빨리 문학관이 세워지길 희망한다.

“원고지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고 한 혼불문학관에서 만난 최명희의 작가정신에 감동한다. 지난 계절 격정을 이겨낸 것들만 묵묵히 결실을 향해 가듯 문학의 길이나 인생의 길은 자연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이철수의 판화에 가슴이 쓸린다. “겨우 요것 달았어/최선을 다했어요/그랬구나/몰랐어/미안해” 가난한 머루송이에게 지난 여름의 흔적은 비루하지만 남과 다른 나로 있을 용기, 그것은 최선을 다한 훈장이라는 것이다.

때때로 멈추고 천천히 걸어야만 자연의 속살같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 위에서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돈이 많은 것이 행복한 인생이 아니란 걸 체득한다. 그것 아니라도 보람된 인생을 사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그리고 인생은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거쳐온 시간들과 내가 만난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해주었다. 여름 한낮 땡볕이 지나간 길 위로 산들바람이 분다. 문득 가을이다.
 
황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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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혜 2016-01-01 10:57:34
원고지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남과 다른 나로 있을 용기를 키우는 것이 바로 글을 쓰고 읽고 내 생각을 세워가는 연습이라 생각이 듭니다. 때때로 멈추고 천천히 걸어야만 자연의 속살같은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끔은 뒤를 돌아보고 놓치는 부분에도 다시 만나지 못할 속살을 찾으려 두 눈을 크게 뜹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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