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4)
  • 경남일보
  • 승인 2015.10.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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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4)

[동호 그 자식도 쟤 남편 같다면 얼마나 좋아. 젠장, 결혼을 얼마간 살아보고 할 수도 없고…]

양지는 회원 명단에서 또 하나의 이름이 지워질 것을 예감한다. 배신이 아니라 저건 몽골이라는 개 한 마리를 향한 억지스런 사랑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저 홀 안의 광경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무리 독신의 철벽을 쌓고 있는 골수 독신주의자라도 한번은 변심을 품게 할 수 있는 충분히 생산적인 상호보완 관계의 현장 아닌가. 아아. 양지는 머리를 흔들며 머리카락 속으로 깊이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야 이러다가 우리 우먼파워 회원들 한 사람도 안 남는 거 아냐? 독신계가 아니라 아줌마계가 되고 말겠다 얘]

참석했던 동창들은 아까부터 두렵고 부러운 듯이 소곤거렸다. 양지는 공연히 수세꼭지를 지긋하게 눌러 물소리를 냈다. 정아의 목소리는 차단되었다.

우리 회원들, 우리 회원들-. 양지는 회원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번역을 하는 정아로 부터, 디자이너, 화가, 대학 강사, 미용실을 경영하는 은아, 피부 관리사, 속셈웅변학원 강사, 모 국회의원의 스피치라이터도 있는가 하면 보일러공장 간부인 양지 자신도 있다. 능력 있고 똑똑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엘리트 선후배들. 하지만 남들은 곱잖은 시선으로 머리만 끓어 넘친 처녀애들이라 비아냥거린다. 타인처럼 차갑고 몰인정한 인심도 없다. ‘우먼파워’ 그들이 왜 억지로 그런 모임을 결성하고 독신의 길을 선택했는지 이해하지 않는다. 거저, 국으로 가만있으면 여자로서 누릴 것 누릴 수 있는 환경이면서 아스팔트 길 등지고 구태여 사막 길을 고집하는 이상 성격자 취급을 한다. 차고 맵고 단단하게 변한 저들의 감정이 어떤 요인의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해해 주려는 노력은 어머니나 여형제들도 하지 않는다.

조금 볼일을 본 것도 같았다. 무심코, 사용한 화장지로 시선을 보냈던 양지는 당황해서 손짓을 멈추었다. 색깔이 달랐다. 그녀는 당황했다. 지독한 불순이었다. 꽃도 꽃나름이지, 고목에 핀 꽃은 열매도 못 맺어. 언젠가 예고 없이 맞았던 이런 불순 때 생리대 대용으로 쓸 거즈를 넘겨주면서 추 여사가 하던 핀잔이 떠올랐다. 양지는 얼른 눈길을 돌려버렸다.

[쟤 속에 그런 구미호가 숨어있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었나. 자존심 상해서 비법을 전수해 달라 할 수도 없고]

정아의 여전한 툴툴거림에 이어 화한 담배 연기가 흘러 들어왔다. 진 다홍 매니큐어 사이에서 담배가 떨리고 있을 것이었다.

‘상대의 마음에 흡수되기를 잘한 거지, 우린. 그 점만 성공한다면 별로 어려움은 없다고 봐.’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어쩌면 연년생 어린것들도 떼어놓고 유학 갈 허락을 얻어냈느냐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을 목격한 것처럼 신기해하는 친구들에게 저 배신의 소프라노 김 순화는 뻔뻔스럽게 남편 자랑을 했다. 흡수? 흡수라고? 경험한 바지만 자존심이라는 감정의 뻣뻣한 저울대가 부러지지 않는 한 남자라는 이름의 상대와는 차 한 잔을 다정하게 마시기도 어렵다며 콧대 세우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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