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7)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7)
  • 경남일보
  • 승인 2015.10.19 0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7)

문득 으스스했던 간밤의 꿈자리가 상기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언니가 보였다. 반갑다기 보다 이게 무슨 조짐인가 덜컥 경계심이 일었다.

‘명자언니가 대만여행을 다녀왔다니까 내 언니도 살았었다면 하는 비감의 골을 타고 언니가 보였을 거야.’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고 출근하여 책상 앞에 앉아 사무를 보는 동안 스산했던 꿈에 대한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영험 있는 사람은 흉조이든 길조이든 해 저물기 이전에 꿈의 징후를 경험한다고 하지만 양지는 피곤하니까 그저 헛꿈을 꾼 것이라고 무시해 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문득 새벽의 기분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무시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깊이 박혀있는 꿈에 대한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던 지도 몰랐다. 그러나 되짚어보면 그렇게 일진이 잘못 풀린 날은 아니었다. 환송파티에서 보았던 친구 남편의 파격적인 모습. 현태나 병훈의 전화. 잘 골라잡아야 하는 부담은 있지만 자신은 선택의 키를 잡고 있는 것이다. 망설이고 있을 뿐 내게도 기회는 있어. 정아 앞에서 시치미 떼느라 아슬아슬했던 순간은 있었지만 복잡한 가운데서도 양지의 속마음은 마냥 고무되어 있었다. 우먼파워의 열쇠를 넘겨준 것도 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벗은 듯이 가벼웠다.

오늘은 무엇을 좀 살까. 새로 수리해서 문을 연 가게 앞에서 양지는 발을 멈추며 저쪽 구석지의 대야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여자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물간 생선을 타박하는 동네여자들과 이게 어디 상했느냐고 억지를 쓰던 여자를 양지는 지나치는 길에 여러 번 목격했다. 너희는 어떻게 돈 가지고 장을 보러 오는 복을 누리고 사느냐고 오기 찬 음성으로 쏘아댈 때는 그래도 그녀가 키우고 있는 어떤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수리한 점포에다 이름만 ‘제일슈퍼’라고 갈아 단 가게의 새 주인으로 그녀가 다시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았을 때의 측은함이란…. 정분나서 집 나갔던 남편은 끝내 건강마저 해쳐서 먼 데 사람이 되어버렸고 버릴 수없이 매달린 철없는 아이들, 그리고 크고 작은 삶의 복잡한 부제들. 양지는 늘 그 여자에게서 어머니를 보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 여인. 양지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하듯 비록 자그마한 것일지언정 되도록 이 가게에서 물건을 샀다. 부지런한 것은 복이 되지 않았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그나마의 생도 위협을 받을 뿐인 기약 없는 고단한 삶이었다. 마늘을 까거나 동부를 까거나 도라지를 헹구고 진열대의 먼지를 털면서 물에 젖은 여자의 퉁실한 손길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저이는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늘 궁금했었다. 복 많은 친구를 보고 오는 길이라서 그럴까. 오늘따라 가게 여자의 그 둔하고 탁한 동작이 저 위에 있다는 행복의 세계, 그 위로 향하는 무거운 바위 돌을 밀어 올리느라 안간힘쓰는 불운의 시지프스처럼 답답해 보였다.

습관 된 손길이 허전하긴 했지만 과감하게라고도 말할 수 있는 동작으로 양지는 가게 앞을 벗어났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