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8)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8)
  • 경남일보
  • 승인 2015.10.1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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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 (8)

가게 여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흡수’의 비결을 체득하여 새처럼 멋지게 비상하는 동창을 보면서 그래 나도 한 번 시도해 보자, 모처럼 끌어 모았던 용기가 다시 와해되어버릴 것 같은 불길함이 일었다. 삶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의 길을 가는 것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예감을 부채질하듯 떠올랐던 것이다.

양지는 천천히 걸으며 자신의 결심을 점검해 본다. 부조금 봉투나 들고 다니는 전직 시골조합장의 가난한 장남인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병훈 보다는 아무래도 현태 쪽이 낯익고 인간적인 포용력도 나았다. 나이가 동갑인데도 보호자 행세를 톡톡히 하는 현태의 남존여비에서 비롯된 권위의식에 대한 거부감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다보면 어느 정도 가실 것이다. 그까짓 가난쯤이야 이골이 났고….

몇 발자국 가볍게 옮겨가던 양지는 걸음을 멈추었다. 배음을 이루고 층층 깔려있는 일상의 소릿결들 속에 파격적인 소란함이 끼어들었다. 와장창, 아그랑창창, 부딪치는 생활 집기와 유리창 깨어지는 소리와 분에 못이기는 고함 소리는 옆 골목 안에서 났다.

[그래, 이 쌍년아, 오늘이 니 제삿날인 줄 알아라!]

세상을 박살내고 말 것 같은 악에 받친 남자의 고함소리. 빠지면 안 되는 듀엣처럼 그에 지지 않는 앙칼진 여자의 음성.

[엣끼 순, 무식한 인간. 애비라 카는 기 새끼들 눈도 안 부끄럽나]

[저 x할녀러 여편네가 보자보자하니까 이제는 못하는 소리가 없네.]

[그래 x했다, 이놈아. x해서 자석새끼 셋 내질렀다. 세상이 어떤 세상이고, 여성상위 시대다. 내가 언제꺼정 네놈한테 죽어지낼 줄 알았더나. 흥, 어림도 없다. 아나 콩콩 맛봐라] .

무엇인가가 다시 메다 부쳐지고 충돌하고 박살나는 소리와 비명, 비명. 그만 좀하라고, 이웃에서 넘겨다보고 내지르는 역정 소리. 그러나 아랑곳없이 싸움은 계속된다. 귀 기울이고 들어보면 비단 그쪽에서만 나는 소리는 아니다. 동서남북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유사한 투쟁의 소리는 비탈 동네의 어느 골목에서도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양지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올망졸망 고개 숙이고 있는 언덕배기의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서울 사람이 되고자 아직도 먼 마음의 서울사람을 지향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들어 살고 있는 무식한 여자도 이제는 소박하고 순종적이지만은 않다. 남자가 있고 아버지란 말뚝을 정점으로 모여서 그들이 짓고 허물면서 삶이란 이름으로 내지르는 소리들. 불 밝혀진 창만을 먼빛으로 볼 때는 평화스러움이 느껴지지만 참고 참으면서 몽글려진 그들, 여자들의 팽창된 인내는 이제 점점 언제 터뜨려질지 모르는 시한폭탄화 싯점에 이르렀다.

여성상위시대. 양지는 입술로 가만히 발음해 본다. 오늘 처음 들은 소리는 아니다. 시골아낙네 호남이도 자주 쓰는 말이다. 어이구 저걸, 저 철딱서니를 어쩌누. 걱정이 잦아든 근천스러운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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