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3 (3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3 (32)
  • 경남일보
  • 승인 2015.11.24 1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3 (32)

“이번 달에는 외상 값 안 떼이고 좀 살아보나 하고 치마허리가 빙빙 돌게 배를 주리고 살면 집에서 또 급한 일 생겼다고 돈 필요하다는 환장할 것 같은 연락이 오는 거야. 빛을 보면 쓰러질까봐 아예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지만 하늘은 왜 그리 노랗게 시도 때도 없이 팽팽 돌아서 사람을 쓰러뜨리던지”

이제 여기 주인이 나라고 문패를 가리켜보이던 날 명자언니는 노을 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담담한 어조로 잠적했던 시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도 나는 행운이었지. 폐병으로 꼬챙이처럼 말라가지고 숨을 쉴 힘도 없어서 어느 날 밤잠을 자다가 깨어나지 못한 친구. 외꽃처럼 샛노란 얼굴로 크렁크렁 기침을 달고 살면서도 병원비가 겁나서 병원 한 번 못가보고 버티다가 피를 바가지로 토해내고 죽어버린 그 애를 생각하면 꿈속에는 늘 지옥을 헤매었어. 심성이 착해서 극락에 갔을 거라 위안하면서도 우리는 그런 생각을 어둡게 품고 있었어. 남을 위해서, 아니 나 자신을 위해서 착한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거든. 언제나 다음에, 이다음에. 우리는 그렇게 절실한 희망에 대한 그리움을 이 다음이라는 등불로 대신 걸어놓고 살았지. 내 친구들은 모두 짐승 같았어. 아니 부모들도 짐승 같기는 마찬가지였어. 권에 의해서였기는 했지만 딸자식의 시체를 해부용으로 의과대학에다 팔아넘기고 침 발라 가며 돈의 금액을 세던 아버지, 그 돈이 어디에 쓰일 건지 너무 잘 알고 있던 우리들은 황소처럼 속을 앓았을 뿐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했지. 누이가 썩은 거름으로 대학이나 유학을 나온 아들자식이 과연 그 부모에게 얼마나 효도를 하는지, 그렇게 가난한 부모들의 죄 많은 딸년들이 내 주위에는 수두룩했어. 끝도 없는 암흑의 터널이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니. 하지만 나는 엄마와 아버지가 굿 잘한 덕인지 곧 그 지옥 속을 탈출할 수 있었지. 누가 손가락질을 해도 나는 떳떳해. 그 나마라도 내가 소용 될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그 제의를 받는 순간 나는 내 속을 다 뽑아 던지기로 결심했다. 큰 것만 보고 앞만 보기로 했어. 기회가 왔다, 이게 기회다 싶은데 놓쳐서 되겠니? 그런 횡재수가 뻗치지 않는 한 평생 그 모양으로 살다 죽어야할 신세 아니더냐”

마음속에 쟁여서 꿈틀거리고 있던, 누군가에게 한번 털어놓은 다음 씻어버리고 싶던 아픈 고름인지도 모름과 동시에 자랑하고 절정의 희열인지도 몰랐다. 명자언니의 입에서는 고급 포도주의 좋은 향기가 달큰달큰 흘러 나왔다.

“영감은 나보다 쉰 살이나 많은 칠십 다섯이었다. 게다가 중풍이 들어 거동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