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3 (3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3 (34)
  • 경남일보
  • 승인 2015.11.2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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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3 (34)

‘아버지를 위해서’ ‘아버지에게 보답’이라는 명자언니의 말은 수시로 떠올라 이중적인 암시로 양지의 심사에다 돌을 던졌다. 명자언니의 아버지도 무능한 깐으로 치면 남다를 바 없는 이름뿐인 아버지였다. 당골네의 북짐을 굿판까지 져다주고 복채로 받은 쌀을 받아 나르는 것이며 간혹 뒷산에 올라가 넋 잃은 듯 먼산바라기를 하는 게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있다한들 조금도 미덥지 않은 심약한 마음씨며 겨릅대처럼 잔약한 체구 또한 소작 농토라도 얻어서 꿍꿍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을 기대할 형편도 못되었다. 하므로 굿거리가 뜸하면 속수무책으로 양손재배하고 있어야 하는 어미아비를 먹여 살리기 위해 당골네의 딸들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직물공장이나 남의 집 식모로 집을 떠나야 했다. 그야말로 천형처럼 가난만을 물려 준 지지리도 못난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그런데 명자언니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느니 보은이라느니 하는 말을 아주 당연한 듯이 했다. 또 큰자식이라는 말을 아주 기꺼운 듯이 입에 담았다. 양지는 아무래도 공감 되지 않는 말이어서 그럴 때의 명자언니를 유심히 뜯어보곤 했다. 성남이라는 이름과 명자를 바꿔보기도 했다. 언니라면. 하긴 성남언니도 살아있었다면 명자언니와 다를 바 없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을 가족에게 바치지 않았을까….

양지는 명자언니가 노동을 팔았다는 것으로, 자신의 희생을 감수했다는 말에 대한 역겨움으로 그와의 결별까지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회사의 부도나 노동쟁의와 같이 겹치는 불황으로 칩거하여 라면 한 개를 살 여유도 없이 숨죽이고 있어야했을 때, 의외로 이해의 폭은 넓게 그녀의 시선 안으로 명자언니를 맞아들였다. 꼭 같은 상황이 되어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라는 말을 함부로 할 게 아니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양지는 마음이 편치 않다. 종조부가 연변에 살아있다는 정보만 입수하지 않았어도 명자언니는 너그럽게 성남언니와 다름없이 양지의 응석과 엄살을 받아주었을 것이다. 러시아종 ‘부르주아’의 위협적인 커다란 목청이 허연 이빨을 깊이 박을 듯이 다가들었던 그 밤만 해도 표면상의 우정은 원만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잔디를 가르고 카펫을 깐 것처럼 정교하게 연이어져 있는 빨간 보도블럭 저 편의 현관문을 열고 명자언니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지 않고 뭐해. 그 집 개는 흔치않은 외국종이었다. 크고 털이 긴 체구만 보아도 위협을 느껴 꼼짝도 못하는데, 약 올리듯 느름느름하게 웃고 있는 명자언니를 보자 양지는 울컥 모멸감을 느꼈다. 계속 머뭇거리고 있던 양지는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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