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5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52)
  • 경남일보
  • 승인 2015.12.2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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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52)

달이 안찼는데. 양지는 자신 있게 말하던 끝을 급히 흐렸다. 지금 정남이 상태로는 그게 정상이다. 정상적인 것이 비정상일 수 있고 비정상적인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결과가 된 것이다. 예전의 정남이가 어디 저러했던가. 이슬 머금은 구절초처럼 앳된 미소에 남을 탓할 줄 모르는 착한둥이, 현실에 순응하며 누구에게든 정을 주던 여린 아이. 그런데 빠끔한 데 없이 얼굴을 뒤덮고 있는 상처며 비듬과 먼지로 때가 끼어 뻣뻣하게 곤두 선 두억시니 머리카락, 경계의 촉각을 잠시도 늦추지 않는 새끼 밴 암짐승의 그것처럼 살벌하고 예민하게 번쩍일 푸른 눈빛, 누더기 같은 옷 밑으로 불룩하게 내밀고 있는 만삭의 배, 웃옷의 앞섶을 비집고 터질 듯이 솟아오른 무지하고 천박스럽게 커다란 젖통…, 길에서 어쩌다 만나면 눈을 돌리고 연민해 마지않던 거지아낙의 모습, 그게 바로 정남의 형상이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변모였다. 이제 청초하던 그 구절초는 쓰레기 같이 짓밟혔고 미소로 동화되게 하던 아리잠직한 그 소녀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게 망가져 버렸다.

5

지난 어느 날…. 양지는 극도의 분만 진통으로 몸부림치는 정남의 비명을 들으면서 안타까워한들 아무 소용없는 그 운명의 날을 되짚어 본다. 왜, 기민하게 망설임 없이 현실의 구렁텅이 앞에서 정남을 뽑아내 올 생각을 미처 못 했을까.

“언니는 겉으로는 집 걱정 온갖 것 다하는 것 같음서 진짜로는 혼자만 편할라꼬 해. 언니는 너무 냉정해. 속에는 차돌멩이가 든 인간이다.”

짐 싸들고 나온 저에게 곰살궂게 대해주지 않는다고 호남이가 퍼부은 말이다. 정신없이 홧김에 나오는 대로 악다구니하는 소리로 흘려들었던 것이나 곰곰 생각해 보면 호남의 말은 양지의 정곡에 적중했다.

이런 엄청난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모른 채, 정남의 자취방을 찾아 처음 산동네를 걷는 동안 양지는 문득문득 저 자신이 옛날로 돌아 온 듯 한 착각에 빠졌었다. 동네가 이래봬도 방이 천세가 난다는, 집주인들의 판에 박힌 제집 자랑을 들어야 하는 것까지 어쩜 이렇게 사람 사는 동네란 끼리끼리의 특성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저렇게 부지런히 일하는데 왜 부자가 못되는가 싶게 새벽부터 밤늦도록 나대는 그곳 사람들의 부지런한 삶의 동작들까지도 말이다.

“내가 주인인데, 맞소. 몸이 아프다꼬 엊그제부터 집에 있던데, 따라 오이소”

골목에다 자리를 펴놓고 앉아 장식용 꼬마전구를 조립하고 있던 서너 명의 퉁퉁하게 살찐 볼품없는 치장 새의 여자들 중에서 빨간 몸뻬를 입은 여자가 일어섰다. 조립된 전선 묶음 위에다 작업용 면장갑을 휙 벗어 던졌다. 같이 일하던 다른 여자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이 양지의 뒤통수를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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