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에서
겨울산에서
  • 경남일보
  • 승인 2016.02.0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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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련 (경남교육정보연구원 교육연구사)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산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좁고 가팔랐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볍게 꾸린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지만, 나는 정작 속도에 대한 조바심만은 다 버리지 못했다. 이런 나에게 산비탈의 급경사는 ‘괜찮아, 조금 천천히 가도 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달리 겨울산은 한 번도 높이와 속도와 효율로 그 사람의 가치를 평하지 않는다.

입구의 경사를 지나면 비로소 소나무숲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교정에서 보았던 히말라야시다, 리기다소나무들은 일제히 바늘 같은 잎을 달고 온몸으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소나무들은 고요한 햇빛의 걸음걸이를 천천히 쫓아가느라 온몸을 비틀어댄다.

많이 비틀어질수록, 더 많이 어긋날수록 소나무는 그 가치를 높이 친다고 한다. ‘무엇인가 되기 위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 우리들에게 소나무는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의 늠름함을 가르치고 있다.

산의 중턱에 오르면 어느새 땅은 무르고 순하다. 산자락의 한 쪽 끝에는 밭농사를 짓는 할머니가 있다. 햇빛 아래 한참 동안 앉아 있는 할머니의 굽은 등이 보이고, 그 위로 오래도록 쏟아져 내리는 겨울 햇살이 푸지다. 할머니가 키우는 도라지와 봄동 배추는 단단하고 튼실하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쉽게 접하는 하우스 채소들은 싱겁고 물이 많다. 인공적으로 모든 것이 갖춰진 환경보다 무엇인가 결핍될 때, 더 강하게 성장하는 것은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소중한 것의 결핍이 오히려 성장하는 것의 표징이라고나 할까.

마침내 산의 정상에 서면, 산이 오롯이 품고 있는 암자 하나가 있다. 보이지 않아도 산은 봄 맞을 준비를 하고, 암자의 노스님은 장독마다 마른 김을 덮으며 봄을 기다린다. 그 어떤 살아가는 소리가 없어도 겨울산은 분주하다.

침묵의 숲, 겨울산에서 나는 그 소리를 말없이 들었다. 겨울산은 그렇게 세상의 스승이었다.
 
서행련 (경남교육정보연구원 교육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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