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6)
  • 경남일보
  • 승인 2016.02.1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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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6)

양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넷째 언니 귀남의 부모에게서 자기들은 잘 사니까 걱정 말라는 안부 편지가 온 날은 가슴에 못질 되어있던 녹슨 대못이 쑥 빠지는 느낌이더라는 깊이 감추고 있던 속마음도 그때서야 비로소 털어놓았다.

“뒤쫓아 올 사람들을 피해 무작정 한없이 도망을 갔제. 등에 업힌 어린것은 전에 없던 웬 호강이냐 싶었던지 하 좋아라 웃음시로 벌떡벌떡 춤을 추었제. 산등성에 이르러서야 발을 멈추었다. 잘 익은 불길매이로 시뻘건 붉새가 앞길을 막고 있는 기라. 비로소 정신이 든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집에서, 에미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자식들 생각이 퍼뜩 난 기라…. 그래, 어디 가서든 아프지 말고 잘 크기만 해라. 부디 건강하고 밝게 착하게, 남에게 미움 받지 말고…. 천치가 된 듯 자꾸 자꾸 아이의 몸을 쓰다듬기만 했제. 아아는 점차 내 손끝에서 피멍이 되어 복장으로 들어 와 자리를 잡았고…. 니도 마실래?”

양지는 잠자코 어머니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그러나 얼른 마시지는 않았다. 내려다 본 소주 컵이 렌즈로 확대되었다.

‘너, 옴마가 애를 몇이나 낳았는지 아나? 열도 넘는다. 그 아아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우찌됐는지 모르쟤? 독종. 등신, 천치, 병신. 내가 입만 뻥긋하면 당장 감옥으로 잡혀가고 말걸’

성남언니의 얼굴, 낮고 음험한 소곤거림이 묻혀있던 기억의 저편에서 되살아났다.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 걸리면 누구든 물어뜯고 말 듯 허옇게 이빨을 사려 물고 독기 오른 눈을 빛내며, 마치 범죄꾼을 밀고하듯이 작게 말해 놓고 낄낄낄 신나는 목소리로 언니는 웃어젖혔다.

양지도 어머니가 아이를 많이 낳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젊은 어머니는 항상 보름달 같은 만삭의 배를 안고 베틀에 앉아 베를 짜거나 들일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임신 중독증으로 풍선 인형처럼 전신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잠시도 쉬지 않았다.

장마구름처럼 항상 기미로 얼룩덜룩 뒤덮여 있던 얼굴, 수심 낀 한숨 소리도 잊히지 않는다.

후에 간호대학 출신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상식으로 유추해 낸 사실이지만 임신을 촉진하기 위해서였던 듯, 어머니는 석 달 이상 모유를 먹이지 않았다. 언제나 양지 네의 제석자리 위에는 암죽거리 백설기가 하얗게 널려 햇볕에 말려지고 있었다.

이십세기, 만개할 대로 만개한 문명-.

흔히들 이 좋은 세상이라고 한다. 좋은 세상을 전제로 해서, 남의 것까지 허겁지겁 나이를 주워 먹은 듯 그 나이의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겉늙어 보이는 고향의 어머니를 떠올리면 양지는 화부터 났다. 숨통 막히는 듯 가슴이 답답했다. 고집쟁이, 미련퉁이….

어머니, 그 고집쟁이, 미련퉁이의 별명은 ‘겨자’씨였다.

아버지가 자기 아내에게 보인 유일한 관심의 표시였다고나 할까. 애정이라곤 한 곱도 없이 비아냥거림만 섞인 이 별명을 어머니도 아버지도 지금은 모두 잊어 버렸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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