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7)
그 겨자씨, 옹고집쟁이가 최 씨 가의 십사 대 종부로 시집을 온 것은 그녀 강 처녀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서 말 지기 가마솥에서 누룽지를 긁는 새댁의 모습이 어찌나 잠삭하고 야무진지 꼭 인형 같았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말도 마라. 내가 시집 와서 처음 한 일이 뭣인지 아나? 때 낀 정지 그릇 닦기, 솔기도 안 보이는 이불잇 씻고, 끓는 물에다 이, 벼룩을 퇴하는 기라. 남정네 둘만 살던 살림이니 겨우 쌀만 익혀 묵고 살았제. 이래 가지고 조상님들 사 대 봉제사는 우에 받들었는고 싶더라”
할아버지는 양지의 어머니가 아직 열 서너 살밖에 안 되는 계집아이 일 적에 이미 친구의 딸인 그녀를 며느릿감으로 점 찍어놓고 있었는데, 일화가 있었다. 작은 체구가 흠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가 보인 범백은 어릴 때부터 타인의 이목을 끌었다.
문을 열어보니 소찬이지만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아까 보았던 어린 계집아이를 떠올리고 그 어린것의 내외법에 내심 감탄을 하며 상을 들어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다 해 갈 무렵 또 아까와 비슷한 기척이 들렸다. 예상했던 대로 숭늉 그릇이 대령해 있었다.
친구가 돌아오자 할아버지는 주저할 것도 없이 허혼을 빌었다. 그 어린것의 사려 깊음, 예의범백…. 할아버지는 놓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친구 하나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사랑? 그때는 그런 말이 있는 줄이나 알았더나. 신랑감이 목자가 어떤 지나 알았던가, 어른들이 시키는 일이니 시키는 대로 할 밖에 감히 딴 생각을 품을 줄이나 알았던가”
어머니는 쓸쓸하게 웃으며 한동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담담하게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사당에 제를 디리고, 족보까지 친견시킨 뒤, 너그 할아부지가 내 앞에서 넙적 무릎을 꾸시는 기라. 놀라움이 안가시서 우짤 줄 모리고 있는디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내 손을 잡고 하소연을 하시지 않겄나. 지금은 내용을 얼추 잊었다만 흰 베에 물 들데키 내 가슴에 흠뻑 젖어든 그 분의 정한만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지끔도 쟁쟁하게 귀에 새기져 있는 말씸은, 이제 우리 집의 흥운은 오직 자네한테 달려있네. 부디 다남해서 이 가문의 옛날 영화를 되돌리게 해주시게…. 그 후 보름도 안돼서 내게 보여주시는 게 뭐였는지 모르쟤? 참 지끔 생각해도 우찌 그리 큰 천벌이 내맀는지 머리끝이 쭈삣해진다. 아직 잉태도 안 된 손자들 이름을 줄줄이 지은 기라. 끝 자가 사내 남자로만 된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라. 이 어른이 혹시 실성을 하신 게 아닌가 덜컥 무섬증이 들기도 했고. 내가 낳아 바쳐야 될 머스매 이름이 자그만치 열이 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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