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7)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7)
  • 경남일보
  • 승인 2016.02.1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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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7)

그 겨자씨, 옹고집쟁이가 최 씨 가의 십사 대 종부로 시집을 온 것은 그녀 강 처녀의 나이 열여섯 살 때였다. 서 말 지기 가마솥에서 누룽지를 긁는 새댁의 모습이 어찌나 잠삭하고 야무진지 꼭 인형 같았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말도 마라. 내가 시집 와서 처음 한 일이 뭣인지 아나? 때 낀 정지 그릇 닦기, 솔기도 안 보이는 이불잇 씻고, 끓는 물에다 이, 벼룩을 퇴하는 기라. 남정네 둘만 살던 살림이니 겨우 쌀만 익혀 묵고 살았제. 이래 가지고 조상님들 사 대 봉제사는 우에 받들었는고 싶더라”

할아버지는 양지의 어머니가 아직 열 서너 살밖에 안 되는 계집아이 일 적에 이미 친구의 딸인 그녀를 며느릿감으로 점 찍어놓고 있었는데, 일화가 있었다. 작은 체구가 흠되지 않을 정도로 그녀가 보인 범백은 어릴 때부터 타인의 이목을 끌었다.

어느 날 양지의 할아버지가 친구인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 어른들은 모두 출타 중이었고 조그마한 계집아이만 집을 보고 있었다. 끼니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사랑방에서 친구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때가 지나도 친구는 오지 않고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초조해 있는 할아버지의 귀에 의도적으로 물건을 드놓는 작은 소리가 마루에서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소찬이지만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아까 보았던 어린 계집아이를 떠올리고 그 어린것의 내외법에 내심 감탄을 하며 상을 들어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다 해 갈 무렵 또 아까와 비슷한 기척이 들렸다. 예상했던 대로 숭늉 그릇이 대령해 있었다.

친구가 돌아오자 할아버지는 주저할 것도 없이 허혼을 빌었다. 그 어린것의 사려 깊음, 예의범백…. 할아버지는 놓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친구 하나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사랑? 그때는 그런 말이 있는 줄이나 알았더나. 신랑감이 목자가 어떤 지나 알았던가, 어른들이 시키는 일이니 시키는 대로 할 밖에 감히 딴 생각을 품을 줄이나 알았던가”

어머니는 쓸쓸하게 웃으며 한동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곤 담담하게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사당에 제를 디리고, 족보까지 친견시킨 뒤, 너그 할아부지가 내 앞에서 넙적 무릎을 꾸시는 기라. 놀라움이 안가시서 우짤 줄 모리고 있는디 눈물이 고인 눈으로 내 손을 잡고 하소연을 하시지 않겄나. 지금은 내용을 얼추 잊었다만 흰 베에 물 들데키 내 가슴에 흠뻑 젖어든 그 분의 정한만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지끔도 쟁쟁하게 귀에 새기져 있는 말씸은, 이제 우리 집의 흥운은 오직 자네한테 달려있네. 부디 다남해서 이 가문의 옛날 영화를 되돌리게 해주시게…. 그 후 보름도 안돼서 내게 보여주시는 게 뭐였는지 모르쟤? 참 지끔 생각해도 우찌 그리 큰 천벌이 내맀는지 머리끝이 쭈삣해진다. 아직 잉태도 안 된 손자들 이름을 줄줄이 지은 기라. 끝 자가 사내 남자로만 된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라. 이 어른이 혹시 실성을 하신 게 아닌가 덜컥 무섬증이 들기도 했고. 내가 낳아 바쳐야 될 머스매 이름이 자그만치 열이 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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