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8)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8)
  • 경남일보
  • 승인 2016.02.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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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88)

다 지나간 이야기여서 일까. 말만큼 질리고 무서운 기색도 없는 무표정으로 어머니는 입술을 딸삭딸삭하며 무언가를 혼자 뇌이기 시작했다. 우정 손가락까지 꼽았다. 아마 첫째부터 이름을 외우는 것이리라. 양지도 어머니를 따라 머리를 굴려 보았다. 첫째 성남, 둘째 경남, 셋째 용남, 넷째 귀남, 다섯째 쾌남, 여섯째 후남, 일곱째 도남, 여덟째 호남, 아홉째 선남, 열째 정남, 열하나 열 둘 열 셋 열넷 열다섯…. 양지는 문득 역겨워져 생각을 헤쳐 버렸다.

어둡고 깊은 미망이었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정신병적인 집착으로 이미 버려져 있던 상태였던지 몰랐다.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족들 모두를 도구화해도 좋다는 가부장적인 편견과 폭압. 나이 어린 며느리의 진정성을 사로잡기 위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보일 만큼 교활함까지 겸비한.

“내 어떤 때는 너그 할아부지가 복쪼가리도 지지리 없는 내 겉은 걸 며느리로 점찍었다니, 가만히 혼자 미안할 때가 있다. 시집 온 다음해 봄에 너그 할아부지는 씨오쟁이를 내한테 안기고 들로 나가싰제. 손이 건 아낙은 호박 한 구덩이를 심어도 호박이 조랑조랑 많이 연다는 말이 있는데 며느리인 내가 타고 난 복을 미리 점쳐 보고 싶었던지도 몰라. 그런데 내가 뿌린 씨는 대부분 싹이 안 텄고 싹이 튼 건 그나마 잘 크지도 안했다. 내 그걸로 보고 내가 부자로 살 팔자는 안 되는 고나 짐작을 했제. 그렇지만 자슥농사꺼정 이리 될 줄, 생각하모 너그 할아부지한테 송구시럽어서 하는데 까지는 한다고 했더니라만…”

양지는 측은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까지 얼마나 지독하게 최 씨 가의 주술적인 인습에 절어있는 상태인지. 어머니는 아직도 거추장스러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는 것으로도 선대의 정신을 이어받아 잘 보전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촌티가 줄줄 흐르는 헤어스타일을 파마머리로 바꾸기 위해 언제 한번 호남은 미장원까지 어머니를 꾀여 낸 적이 있었지만 내가 그깟 뽄 내갖고 뭐할거냐면서 남들 보는 앞에서 실랑이만 벌이다가 결국 지고 말았다고 투덜거렸었다.

‘요즘 세상에 옴마 맹키로 쪽진 사람이 어딨노. 그것도 금비녀 옥비녀 바꾸어 감서 찌르고 금잠 옥잠 골라서 머리장식을 할 수 있는 귀부인이라모 또 몰라. 어데 민속촌에서 조선시대 하인 여자가 나온 줄 아는지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안 있나. 것도 머릿결이 기름지고 검기나 하모 또 몰라, 서리 맞은 풀밭 맹키로 기름기 없이 뻘겋게 바랜 머리카락이 풀풀 날리는 걸 보모 자식인 내가 봐도 만정 떨어진다니까. 것다가 또 뭐라는지 아나? 아버지가 화내시기 땜에 파마를 하모 안 된다 안카나. 그게 이유라모 염려 말라캤더마 도살장에 끌려 온 짐승이 목숨 걸고 도망갈라꼬 나대는 것처럼 뻗대는 거 있쟤. 내가 인지 멋 내가 뭐할 끼고, 고마 집안 편한 기 제일이다. 그라는 기라. 엄마도 완전 세뇌가 되고 말았어. 에이, 순고집통, 구제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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