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90)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90)
  • 경남일보
  • 승인 2016.02.1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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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90)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어머니는 스스로 지쳐서 아버지의 관심에서 나온 ‘씨’ 자체에 만족하는 여유를 터득하게 되었는지 몰랐다. 어느 때, 누구도 흉내 낼 수없이 지어 올리는 노회한 미소 속에는 ‘씨’만이 갖고 있는 단단한 자존심이 엿보였다.

이를테면 어머니는 스스로 날 수 없는 나비의 아프고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조금씩 퇴화시키고, 기고 싶다고 마음대로 길수조차 없는 팔 다리를 차례차례 둔화시켜 버린 거였다. 오직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투쟁의 아픔에서 자신을 구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나방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애벌레로, 거슬러 조그만 알속에서 부화의 꿈을 매만지는, 가능성의 ‘씨’로 자신을 남기게 된 것이다. 설령 꿈으로 끝날망정 우주를 품고 있는 생생한 희망 하나를 갑질로 꼭꼭 싸서 간직하고 있는데 만족하면서.

다시 또 이런 날이 있으랴 싶은 진지한 마음으로 양지는 어머니의 가슴에 묻혀있던 소리를 들었고 조금이라도 가까이 인간적인 그니의 심장에 접근해 보려했다. 어머니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손으로 소주 컵을 들고 마셨다. 조금 마시다 컵을 떼어 내며 오달지게 미간을 찌푸렸다. 양지는 어머니를 풀어헤쳐놓고 무언가 맞닿을 만한 부분이 없나 뒤적거리다 끝내는 차라리 어머니의 존재를 환상으로 간직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어쩌다 화제에 오르면 사람들은 어머니를 조선시대의 열녀라고 했다. 어머니의 미욱하고 어리석음을 꼬집는 말임과 동시에 비인간적인 아버지의 처신을 여심의 광장에서 단죄하는 독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독특한 자기 방어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끓어라 일어라, 입 아프면 그만 두겠지.

오랜만에 어쩌다 잠자리를 같이할 때도 입담이 없는 모녀는 마주 앉은 시간이 겹도록 말이 없었다. 끌어내면 이야깃거리야 없지 않겠지만 섣불리 꺼냈다가 묵은 상처만 덧나게 할까봐 서로 조심을 했다. 시궁창으로 쫄쫄 흘러가는 하숫물 소리를 듣고 있다가 생각 난 듯, 의무적으로 간간이 무언가를 묻고 대답할 뿐 두 모녀가 한 데 어우러져 자아내는 분위기라곤 도무지 밍밍하기만 했다. 언젠가 양지도 이제 어머니 혼자 쓸쓸히 지내느니 여기서 같이 지내자는 소리를 한 적이 있었으나 ‘아서라, 내가 여기 와서 뭘 하겠노’ 해놓고 질겨서 끊이지 않는 가는 명주실처럼 표표히 양지의 눈앞에서 멀어지고는 했다.

양지는 그날 밤 피곤하다며 먼저 잠이 든, 커다란 안석 정도도 안 되는 작은 몸피의 어머니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간간이 몸을 뒤채며 아드득, 아드득, 이를 갈았다.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는지 제법 날카로운 음성으로 항의하는 잠꼬대도 했다. 사십 대에 벌써 치아가 절단 나기 시작했던 원인도 어쩌면 저런 잠버릇 때문인지 모른다. 억눌린 현실에 대한 앙화풀이를 잠결에 배설하며 어머니는 자신을 지탱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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