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9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96)
  • 경남일보
  • 승인 2016.03.0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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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7 (96)

시커먼 뻘밭과 엉성궂게 바닥이 드러난 배위에서 양지만 혼자 안달을 낸다. 사공도 보이지 않고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양지는 몸부림을 쳤다. 어서 가야 했다. 거기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가야했다. 어서 가야한다는 것밖에 다른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 혼자 배를 밀었다, 끌었다, 흔들었다.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위의 어둠만이 그녀를 에워싸고 숨통을 조일 듯이 암흑의 농도를 더해간다.

양지는 숨 쉴 수 없이 조여드는 강박감으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곁에 두고 잔 인형처럼 뻐끔하게 정남의 눈이 양지 자신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양지는 정남의 손을 가만히 끌어 잡았다. 버겁지만 거두고 쓰다듬어야할 자매, 피붙이가 아닌가. 차갑고 거친 손의 촉감이 섬찍하게 살갗을 찌르고 들어 하마터면 손을 놓아버릴 뻔했다. 이 손을 누가 열여덟 아가씨의 손이라고 할 것인가. 무엇이, 왜, 이 아이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입술을 힘주어 다물며 격정을 누르노라니 새삼스러운 후회가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자신이 어릴 때와 정남의 지금은 달라야 했다. 자신이 정남이 만할 때는 언니도 죽은 뒤였고 부모의 도움을 바랄 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므로 독사 같은 독기를 품고 어떻게든 혼자 구르고 혼자 뛰어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정남은 달랐다. 언니들이 있는 막내였다. 정남의 지금 이 꼬락서니는 언니라는 이름이 저지른 책임회피의 결과나 다름없다. 늦었으나마 지금이라도 이 아이를 수렁에서 건져 올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양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는 정남의 이마를 걷어 냈다. 머릿결에 가려서 그을리지 않은 피부가 오염되지 않은 영토처럼 순결하게 드러났다. 잔털이 보송보송한 수밀도 같은 피부…. 양지는 손을 떼지 않고 두 번 세 번 이마를 쓸었다. 애처롭고 안쓰러움이 하얀 이마 위로 쏟아졌다.

‘정남아 부디 정상으로 회복되어라.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는 방법을 언니는 이제 알았다. 네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인 거다’

양지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간절한 기도여서 마음의 현까지 흐느꼈다. 어느 신에게, 언제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 보았던가. 양지는 간간이 눈을 뜨고 정남의 기색을 살폈다. 혼곤한 낮잠에서 깨어난 듯 머리를 두어 번 흔들고 펄펄 움직이게 되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은 악몽으로 깨끗이 소멸되어 버릴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정남이 펀듯 사물을 인식하는 순간에 이루어질 기적인 것이다.

양지는 뜬눈으로 잠든 정남의 눈시울을 가만히 내리덮어 주었다. 주사 기운으로 잠 든 정남은 다시 드르릉드르릉 코를 골기도 한다. 베개를 달리 놓고 고개를 바로 해 주니 이내 물속의 흐름같이 결 고운 숨소리를 낸다. 정남은 아직 양지의 뜻 저 멀리에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양지의 기원은 더욱 간절해지고 집요해졌다. 그것은 자책과 맞물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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