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98)
현태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때였다. “도대체 왜들 이러니-.”
어머니를 불러서 간병시키지 않는 독단을 다시 나무라고 있는 짜증 난 음성이었다. 말하나마나 정남에게 또 무슨 일이 생겼음이다. 순간, 양지는 미간을 찡그리며 수화기에서 고개를 돌렸다. 떼칠 수 없이 따라 붙는 현태의 간여가 도움이랄 수 없이 부담스러웠다. 이왕 뒤틀려 버린 일을 두고, 그가 갖는 관심과 간여는 양지 자신의 약점을 확인해 두었다가 필요한 경우에 낱낱이 이용하려는 이중적인 술수의 음험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에도 역시 정남의 증발로 비어있는 침상 앞에서 양지는 현태의 팔에 매달리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현태는 말썽부리는 자매의 큰오빠처럼 침착하게, 방법을 찾아보자고 양지를 위안해 주었다.
정남은 거짓말처럼 말짱한 얼굴로 병실을 찾아왔다. 이튿날도 또 감쪽같이 사라졌다 돌아왔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사태의 추이를 짐작하고 옮길 병원도 신경정신과를 물색하고 있던 참이었다.
“수찬이가 데릴러 갔으니까, 어서 오도록 해. 중간에서 무슨 소릴 듣더라도 마음 단단히 먹고”
어른이 아이에게 주의를 시키듯 일러 놓고 이쪽에서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현태의 전화는 끊어졌다. 곧이어 수위실에서 어서 내려오라는 연락이 왔다.
문 수찬 역시 굳은 표정으로 눈인사만 나눈 채 문을 열고 양지가 차에 타기를 기다렸다. 어떻게 번번이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되는지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표시도, 대체 정남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 말도 걸 수가 없었다. 될 대로 되어라. 끌어가면 끌려가고 패대기치면 나가떨어져 주리라. 고난에 이골 난 심정을 다져 먹자 가슴이 벌렁거리던 놀라움도 차츰 진정이 되었다.
신호가 막혀 차를 멈출 수밖에 없는 곳에서야 수찬이 입을 열었다. 빡빡해 있던 분위기가 동시에 가뿐해지도록 무게 없이 연민이 담긴 음성이었다. 지나가는 차 소리 때문에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수찬이 다시 덧붙였다.
“현태가 뭐라 해도 꾹 참으십시오. 요즘 세상에 찾기 쉽잫은 의리파 친굽니다”
“대체, 걔가 또 어떻게 했다는 건지·····?”
의향이 빗나간 듯, 잠시 멈칫하던 수찬이 이내 되받아 물었다.
“그 친구가 얘기 안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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