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99)
[하긴······. 어쨌든 마음 크게 가지시고 대범하게, 믿는 종교가 있으면 기도나 하십시오. 응급실에 있는데 용태가 나쁘답니다. 사무실에서 연락 받고 바로 와놔서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수찬의 말을 듣는 동안 양지의 의식은 서서히 이완되어 나갔다. 왠지 절망적인 직감이 왔다. 충격이나 실망, 또는 슬픔 따위의 감정은 괴이지 않았다. 아프고 습하기 마련인 그런 상태가 아니라 건조하고 공소하기 이를 데 없는 메마른 심정으로 사건 밖에 서있었다.
그녀의 귀에는 온갖 소음이 깊은 물속에 잠긴 듯이 극히 단순한 한 가지 음절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복잡하고 세세한 가로변의 풍경들도 낡디 낡아서 누르스름하게 변한 흑백 필름의 영상이 흐르는 것처럼 무감동하게 보였다. 이마에는 끈끈하게 땀이 배었고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은 깍지 낀 채로 영 풀리지 않을 듯 굳어 있었다. 다만 한 의식, 시작 된 것은 끝이 있는 법이며 종말을 향한 흐름은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런 담담함이 깔려있을 뿐이었다.
너럭바위로 형성된 개천 바닥이 서서히 습윤 되어 수액이 고이 듯, 며칠 전 맑은 정신이 잠시 들었던 그때 보였던 정남의 동작들이 양지의 허황한 망막 속으로 스쳐갔다. 정남은 맑은 정신이 들면 병원을 뛰쳐나갔다가 횡성수설하면서 다시 돌아와 병원주위를 맴돌다가 그를 눈여겨 본 병원 사람에 의해 병상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다. 수치심으로 병원을 떠났다가 어미의 본능으로 병원을 찾아오는 그 아이의 근성에다 근본적인 자생의 치유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병원을 옮길 동안 특별 배려를 부탁하며 간병인에게는 선불로 수고비를 지불했고 간호사들에게도 성의표시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가 며칠 째 날이던가. 지친 몸을 위무 받는 탕녀처럼 정남이 울기 시작했던 밤.
거리의 소음이 썰물처럼 잦아들고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으로 바람결이 신선했던 밤. 막연히 새벽이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정남이 깨어난 것도 희망적이라고 그 새벽의 느낌에다 연결 짓고 있었다. 정남은 언니를 보자 반가움보다는 두려움과 경계의 빛을 나타내며 멈칫거렸다. 그런 정남을 양지가 먼저 뜨겁게 끌어안았다.
”언니 미안해예. 죄송해예. 애기 낳고 잘 살면서 언니 초대할라꼬 캤는데…“
”괜찮아. 일부러 못되려고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데 있노. 언니 무서워 말고 마음 푹 놔라. 언니 무서운 사람 아니다. 인제부터 너는 언니랑 사는 거다. 널 위해서 뭐든 다 해 줄 거다. 살다보면 가시밭길도 있어. 나쁜 꿈을 꿨던 걸로 깨끗이 잊어버리면 돼“
맑은 정신이 든 기회를 놓칠 세라 가슴에 묻힌 정남의 얼굴을 받쳐 들고 양지는 빠르게 자신의 속마음을 펼쳐보였다. 눈물에 젖은 정남의 두 눈동자에 언니의 모습이 든든한 보호자로 새겨질 것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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