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길교수경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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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6.03.0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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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의 여왕, 자선 사업가 백선행
백선행



1848년 헌종 15년에 백지용의 외동딸로 태어난 한 소녀는 ‘아가’로 불리길 14년, ‘새댁’으로 불리길 2년, 나머지 70년을 ‘백 과부’로 불렸다.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여성치고 이름을 가진 여성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환갑이 넘어서야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하여 ‘선행’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생겼고 그녀의 이름이 되었다. 그녀의 부친인 백지용은 평양 박구리에 살던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그녀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모친 김씨는 죽은 남편이 남긴 가난과 고독 속에서 하나뿐인 딸을 애지중지 길렀다. 편모 슬하에서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성장한 백씨는 열네 살에 가난한 농민 안재욱에게 출가했다. 그러나 병약했던 남편은 결혼 직후 병석에 누웠다. 결국 그는 아내에게 아이 한 명 안겨주지 못한 채 결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열여섯 살이 된 백 과부는 남편을 잃고 다시 과부 어머니를 찾아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80세가 될 때까지 간장 장사, 베 짜기, 콩나물장사, 두부장사 등을 하면서 돈을 꽤나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백선행이 부자라는 소문을 들은 한 사기꾼이 만달산(일명 돌박산)을 싸게 팔았고, 나중에 이 산이 초목이 전혀 자라지 않는 지역임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이 산이 석회암 지대여서 일본인 자본가가 시멘트회사를 세울 계획으로 본전의 몇 십 배가 되는 값에 사주는 바람에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되었고 당시 평안도 일대에 손꼽히는 부자가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항상 근면 성실했고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돈을 모으느라 얼굴에 분 한번 바르지 않고 먹고 입는 것조차도 아주 절약했기에 사람들은 구두쇠 백과부, 악바리 과부라 부를 정도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돈은 써야 값을 하지, 안 쓰려면 모아 뭐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1908년에 그녀는 남편의 묘가 있는 곳에 냇물이 불면 떠내려가는 솔뫼다리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회갑을 기념하여 이 다리를 포장하여 사람들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기부를 하였다. 솔뫼다리는 이때부터 백과부다리(현 백선교)라 불렸으며 그녀 이름도 백과부에서 백선행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

백선행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보고 감격하여 당시 조만식 선생 등 민족지도자들이 사용할 회관이 없는 것을 보고 회관을 짓는데 당시 쌀 한가마니에 5원, 6원하는 시절에 2,800원을 쾌척하게 된다. 그리고 800섬지기에 달하는 논과 밭을 유지기금으로 내놓기까지 하였다. 그녀가 기부한 총액은 자그마치 14만6000원(현재가치 146억원)에 달했다. 그래서 그 건물을 백선행 기념관이라 불렀다. 그 후에도 백선행은 광성소학교, 창덕학교, 숭의여학교 등 여러 학교를 짓는 데 논밭을 기부했는데 일제 조선총독부가 상을 주려고 했으나 거절하였다.

1933년 5월13일, 평양 대동강 기슭의 3층 석조건물 ‘백선행기념관’에는 아침부터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 광성보통학교, 숭인상업학교, 숭현여학교, 창덕보통학교는 일제히 휴교하고 전교생이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백선행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백선행의 영결식은 이훈구의 애사, 200여 통에 달하는 조전 낭독, 각 학교 학생대표의 애도가 합창, 묵념 등의 순으로 한 시간 남짓 이어졌다. 장지인 당상리로 향하는 장의행렬은, 광성보통학교 900여 명, 숭인상업학교 500여 명, 숭현여학교 450여 명, 창덕보통학교 200여 명 등 각 학교대표 2200여 명을 선두로 각 사회단체 대표 등 1만여 명이 참례했다. 300여 개의 화환, 조기, 만장이 늘어선 장의행렬의 길이는 2Km에 달했다. 평양시내 중심가에서 보통강 건너편에 이르는 연도에는 10만여 시민이 도열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평양시민 3분의 2가 참석한 ‘백선행 여사 사회장’은 오후 5시30분 남편 안재욱의 묘소에 합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이었다. 15만 평양시민은 살아생전 고인의 아름다운 행적을 추억하며 그녀의 영면을 기원했다.

/경상대 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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