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15)
성난 음성으로 현태가 설득했지만 양지는 암암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녀가 짓는 침묵 또한 정밀하여 틈입할 여지도 현태는 찾지 못했다.
벽은 아직 높다. 제 힘으로 단번에 허물지는 못할망정 호락호락 굴복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우먼파워 시절에 박혀있던 오기가 양지를 부추겼다.
“너, 나보고 계속 너라고 하는데, 넌 뭐야. 기득권자연하고 상좌로 군림하려는 너는 뭐냐고? 남자는 되고 여자는 왜 안 되는데, 대체 뭣땜에 안되는지 그것부터 대답하란 말이야!”
치밀어 오르는 분노 껏 욕설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양지는 분노어린 주먹으로 현태의 가슴팍을 힘껏 내질렀다.
“윽, 어?”
뜻밖의 가격으로 흠칫했던 현태가 감 잡지 못한 뜻으로 어리벙벙해 있는 동안 양지는 미련 없이 현태로부터 등을 돌렸다. 단칼로 잘린 무의 단면 같은 서늘한 여운에 현태는 감히 다음 행동으로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진주 굿이 나면 한 목 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치 양지에게 밀려들 일들에 대한 예언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양지는 설상가상으로 닥칠 앞일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자기 앞의 하루하루를 근실하게 산다.
막막한 궁지에 몰렸을 때 본능은 반드시 부드럽고 따뜻한 곳을 원하기 마련이다. 현태와 헤어진 양지가 추 여사를 찾은 이유도 그랬다.
“그래, 잘 왔어. 사장은 늦게 올 거라고 전화 왔어. 앉아. 저녁은 어떻게 했어?”
호들갑 떨며 반겨주는 추 여사의 행동을 보며 양지는 엇나가듯 돌려온 걸음이지만 역시 이 길이 내가 선택해야 될 길인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추 여사 앞에서나마 자신은 정직해야 된다는 속마음의 결정도 내렸다.
“강 사장 이사람 아주 이중인격잔 것 내 이제 알았네. 아주 실망이야”
양지가 좋아하는 키위 즙 한 잔을 받쳐 들고 양지가 앉은 식탁 앞에 마주 앉으며 추 여사가 먼저 공동의 화젯거리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한 컵의 주스를 마시고 나자 손에 든 컵을 놓기도 전에 양지는 자신의 걸음이 너무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탈출구로 여기고 온 곳이 여기라니. 아, 나도 어지간히 나약해지고 있구나. 불현 듯 자괴감이 일어났다. 경제가 삶의 최대 요건임은 틀림없지만 그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양지가 살아온 생활방식이었고 철학이었다. 환경적으로 조금만 여의했다면 양지는 학창시절에 철학을 전공하고 싶었었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에 어릴 때부터 자리 잡고 있는 ‘붉은 무덤’에 대한 꺼지지 않는 경외심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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