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17)
양지는 반짝 곤두선 눈빛으로 추 여사의 의중을 주시했다. 무엇을, 무엇을 저 여자가 안단 말인가. 대체 어디까지를. 추 여사는 덜어 담은 찬통에 묻은 양념을 행주로 닦아내며 양지를 설득하기 위한 자기 말과 생각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조상 뼈다귀나 우려먹고 사는 시골 양반집 별 볼일 없는 딸들, 한 많은 것 나도 잘 알지. 최 실장도 앞으로 사람 구실하고 살려면 돈이 있어야 돼. 돈 없으면 이건 사람도 아니고 병신, 짐승소리 듣게 된다고.”
“여사님 말씀도 저를 위해서라는 걸 잘 알지만, 저도 한 마디 할께요. 적어도 부부가 되려면 상대방을 배려할 줄은 알아야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병훈 씨 지금 귀국 전 준비 중이라던데 잡음 넣으면 안돼요. 예술가들은 특수한 정신세계의 이미지를 엮어내는 사람이라서, 무엇보다 영혼을 존중해주는 것이 주위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지켜주면 좋을 예의라고 하거든요”
“아이구야 그랬어. 그럼 그렇기도 하겠다. 나는 오늘이 마침 토요일이라서 여행 삼아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더니. 내가 잠깐 그 생각을, 아니 아니 그러니까 내가 최 실장을 딸처럼 생각하는 거 아냐. 아이고 속도 깊기도 하지. 무식한 내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지 뭐야”
손뼉을 짝 치며 딱따그르 소리 내서 웃어젖히는 특유의 웃음을 허리를 잡고 토해내며 추 여사가 감탄했다. 자신의 결정에 따라 어느 쪽으로든 기울 수 있도록 양손에 떡은 아직 그대로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중요한 실수를 하고 온 듯 한 아쉬움이 남았다. 양지는 집에 다다랐을 즈음에야 병훈의 연락처를 넘겨받지 않았음을 생각해 냈다. 사용을 하든 하지 않든 열쇠는 항상 주인의 손안에 있어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바람대로 양지는 추 여사의 전화를 받았다. 급하고 들뜬 추 여사의 음성이 전하는 말은 병훈이 아파서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강 사장이 친구와 여행을 가고 없으니 걸음 빠르게 달려갈 사람은 양지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목소리에는 남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답지 않게 생기 넘치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약간 의문스러운 구석은 없지않았으나 달려가지 않을 수 없는 좋은 핑계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막상 병훈이 있는 강원도에 도착해서야 양지는 추 여사의 말에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속으로 웃었다. 근질거리는 곳을 알아서 긁어주는 고마운 사람이 추 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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