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2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21)
  • 경남일보
  • 승인 2016.03.2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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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21)

내리닫이 골목길 모퉁이로 사복형사가 사라진 후에도 얼마쯤 멍하니 서있던 양지는 비로소 현실감응을 하며 경직된 몸으로 길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럴 리 없어. 덜렁대기는 해도 호남은 생명을, 더구나 시어머니를 살해할 만큼 잔인한 애는 아니야. 실수일거야’

자신있게 부인할 수 있는 충분한 정황을 양지는 꿰고 있었다. 호남은 없어져주었으면 싶을 만큼 시어머니를 귀찮아하기는 해도 살인자가 되면서까지 제거하고 싶도록 시어머니를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강하게 부정을 했지만 형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이미 저질러진 일의 결과였다. 얼마 전에 들었던 주영할머니의 음성이 쟁쟁 되살아났다. 애증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던, 어른이면서 어른 대접도 못 받고 전전긍긍하던 노인. 그 노인이 죽었단다. 그것도 외아들의 아내인 며느리의 손에. 그런데 그 며느리는 바로 동생 호남이다.

이 흉측한 사건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하지만 수배 나온 형사의 출현은 비록 피의자라는 단어를 꼭박꼬박 끼어 쓰기는 해도 집 나갔던 호남이 돌아와서 저지른 끔찍한 악행의 증거나 다름없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어린이들을 실은 미니버스가 들어왔다.

저기 주영이가 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양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을 했다. 그녀가 갓길로 비켜서자 파란 바탕에다 빨강 노랑 선을 그리고 그 사이에다 음표처럼 예쁜 꽃무늬 장식을 한 속셈·미술학원의 미니버스가 지나갔다. 노란색 원복을 입은 남녀 꼬마들이 몇 올망졸망 앉아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양지는 곧 자신의 사고력이 얼마나 단순한가를 깨달았다. 지금 주영에게는 시간 맞춰 학원에 다닐 그런 평화가 유지되고 있을 리 없다. 날카롭고 비난스럽게 몰려드는 주위의 시선을 피해 외따로 어두운 곳 어디엔가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정자나무 옆에 있는 빨간 이층집이 보이는 순간 양지의 가슴은 둔통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지은 지 얼마 안됐지만 그새 구닥다리가 돼서 빚을 좀 안고 냉방 난방 다 되게 최신식으로 수리를 했다고 자랑하던 호남의 집이다.

‘누구 맹키로 또 초치고 있네. 돈이사 벌몬 되제. 내가 누고 꺼꾸리 아니가. 나는 한 번 하겠다 마음먹은 일은 절대로 하고 마는 사람 아이가. 이 최호남이가 입만 벌리모 돈은 이웃에서 얼매든지 빌리준다. 그러니 걱정은 아예 하덜말고 전화 건 사람 기분이나 좀 맞춰주라. 응, 비디오는 쓰던 걸 하고 오디오는 주영아빠 하자는 대로 최고로 했다. 언니는 모르쟤? 남자가 꼬빡꼬빡 돈 벌어오게 할라모 그만 비위는 맞춰주야제. 주영이 방에는 침대하고 책상, 옷장 스탠드까지 다 했다. 우리 옷장 사는 걸 좀 뒤로 미룬께 돌아가대. 유아원 졸업하모 유치원 가고 해야 될 낀데 필요한 거는 다해 줘야 안되것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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