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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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6.04.0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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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란 (수필가·경남과학기대 평생교육원 수필교실 강사)
손정란

입춘과 우수가 서풋서풋 지나가더니 논두렁 밭두렁에서 냉이, 달래, 해쑥이 우우 올라온다. 언제부턴가 우리 동네 앞 길턱에서 짐차를 세워두고 푸성귀를 파는 한 아주머니가 있다. 그니는 누비 앞치마를 입고 단골손님이 오면 이모야, 이모야 하면서 다뿍 덤을 얹어주기도 한다. 납작한 빨간 대야마다 시금치, 취나물, 돌나물, 상추, 부추, 우엉, 머위를 시울나붓이 담아 놓는다. 햇양파와 미나리, 풋마늘은 단으로 묶은 채 옆옆이 갖추고 애호박 무더기를 더 늘어놓고 퍼질러 앉아 쪽파를 다듬는다.

그니는 종이상자를 찢어 글씨를 되는 대로 ‘에호박한나천원’이라고 적어 놓는다. 애호박은 겨울 내내 비닐 온실에서 자라 나왔어도 싱그러운 봄 냄새가 배어 있다. 손님을 기다리면서 거스러미가 일어난 손을 재게 놀리다가 가끔 꾸벅잠을 자기도 한다. 오늘은 아무래도 호박이 다 팔릴 것 같지 않다.

가분재기로 온몸을 움츠리도록 막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거리 질서를 다잡거나 살피려고 나온 사내 서넛이 영바람을 일으키며 부는 호루라기 소리다. 그니는 과일이랑 생선이랑 속옷을 파는 다른 아주머니들과 바삐 늘어놓은 것들을 아무렇게나 동개고 차에 싣는다. 햇빛 가리개로 쓴 모자가 벗겨져도 주울 틈이 없다. 아까운 것들을 빼앗길까봐 허둥거린다.

“옴마야, 내 에호박….”

호박을 담은 자루를 움켜잡아 올리는 순간 그만 자루 밑이 터져 버렸다. 호박이 우르르 쏟아지면서 차들이 다니는 곳까지 굴러갔는지 택시가 두어 개 짓뭉개 놓고 쌩 가버린다. 그니는 허리를 구푸려 땅바닥에 마구 문질러진 호박을 하나하나 집는다. 더러 멀쩡한 것도 있다. 살바람에 신문지 한 장이 위로 솟구쳤다가 내리박히는 것을 잡는다. 되작거리며 툭툭 털어 펴놓고 호박을 가지런히 모은다. 가슴 속에서 응어리가 복받쳐도 그냥 눅잦힌다.

애호박은 대학을 졸업한 작은아들이 세 해를 빈손으로 보내다 그러께부터 비닐 온실 농사를 지어 맏물로 따낸 것이다.

얼마 뒤 걸고들며 밀막던 사내들이 돌아가고 그니는 처음 있었던 자리에 차를 옮겨 놓고 다시 둥지를 튼다. 그러구러 날이 저물어 어스레한데 ‘에호박한나천원’이라고 써 놓은 종이 쪼가리가 보이지 않는다.

손정란 (수필가·경남과학기대 평생교육원 수필교실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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