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3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32)
  • 경남일보
  • 승인 2016.03.2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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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32)

늘 고분고분 따뜻하게 아버지를 대해 주었더라면 아버지의 득남 소식은 호남이 보다 양지 자신이 먼저 듣게 되었을 것이고 호남의 입장이 곤란해질라 소문을 차단하는 단속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남은 얼마 전에 자동차 면허증을 땄다. 다음에는 컴퓨터를 배울 차례라고 기대가 대단했다. 경운기, 양수기, 콤바인, 트랙터, 예초기 등 농촌생활에 소용되는 기계들 중 못 다루는 게 거의 없다고 으스대기도 했다. 자전거에다 쉴 참을 싣고 빨간 모자를 쓰고 윗도리 뒷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들길을 달리는 호남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언니야, 이 근육 좀 봐라. 몸 건강하고 겁나는 일이 뭐있노. 나는 열심히 일해서 최고로 잘해놓고 잘 살끼다. 쓰고 싶은 대로 돈도 팍팍 쓰고. 가시나 자식도 이렇다 싶어 미안해서 눈물 줄줄 흘리도록 아부지 용돈도 푹푹 많이 주고, 엄마한테도 억수로 잘해 줄 끼다’

호남의 궤적에서 양지는 언뜻 큰언니 성남을 느끼고 있었다. 호남이 아직 귀저기 찰 때 언니는 죽었다. 사진으로 또는 굴러다니는 전설적인 이야기들로 언니를 안게 고작일 테지만 같은 토양에서 자란 동종의 묘목처럼 호남의 생각이나 행동은 언니와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고모의 영(靈)이 언니에게 되 태어났다는 말이 있었듯이 언니 성남의 영이 호남에게 씌었을지 모른다는 말도 영 배제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호남을 면회하자. 그런 생각이 들자 양지는 시계를 보았다.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렸다. 구름의 가장자리를 선 두른 듯 빨갛게 물들이며 해가 지고 있었다. 으스름해지는 산그늘 속으로 분주히 날아드는 새떼들의 날갯짓이 쓸쓸하고 빈 적막을 안겨준다.

‘언니, 참말로 그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호남은 아마 그럴 것이다. 양지의 대답도 뻔했다.

‘아냐, 난 그럴 줄 알았어. 충동적인 네 성격에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고, 자제하는 법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고 그렇게 충고했었지’

그러나 어떻게 그런 말로 상처받은 동생을 다시 꼬집고 때릴 것인가. 필요할 때는 곁에 없던 언니라는 인간이.

면회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떠올리자 양지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언니 니는 우찌 그리 항상 니 빼끼 모르고 식구들한테는 인정머리가 없노’

저와 함께 같이 끓고 같이 들떠 주지 않는 양지에게 호남은 늘 불평이었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매간인데도 어쩜 그렇게 대조적인지 쾌남은 이 집 딸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농담을 이웃 사람들에게도 자주 들었다.

살인죄의 오명을 쓴 무안함으로 어쩔 줄 모르는 호남의 얼굴만 쳐다볼 뿐 그 애를 위해서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양지는 상황이 점점 자신을 견지하기 힘든 쪽으로 겨워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음만 먹다 끝나버린 정남의 일을 참고로, 이제는 좀 적극적으로 언니 노릇을 하리라. 마음을 고쳐먹은 양지는 호남의 일로 하루 종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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