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3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33)
  • 경남일보
  • 승인 2016.03.2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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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9 (133)

그러나 처음 당하는 일에 대한 주춤거림으로 시간만 낭비하고 만 셈이 됐다.

담당자가 없다. 조사 중이니 안 된다. 이리 가보라 저리 가보라. 기다려 보시요. 그때마다 끼쳐오는 불쾌한 시선에 대한 모멸감으로 양지는 그들의 눈길이 묻어있는 옷마저 벗어 던져 버리고 어디든 먼 곳으로 달아나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이리 나올 줄 알았다. 형제간이나 엄마를 위해서 대체 니가 한 기 뭐있노. 세상에서 지 밖에 모르는 인정머리 없는 가시나. 가라, 니한테 덕 볼라꼬 기대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니 혼자 공부 많이 하고 출세해서 잘 살지 와 찾아와서 손발이 묶이고 입 봉창까지 된 내 앞에서 염장 지르고 있노’

호남은 양지가 무슨 말을 하든 목 졸린 고양이처럼 앙앙거릴 것이 분명했다. 양지 역시 고분고분 그녀를 설득해 본적이 없었다. 지나고 나면 후회될 줄 번연히 알면서 동생이나 가족들에게 마음의 문을 연 다정함을 베푸는데는 흔쾌하지 못했다.

결국 오전 내내 창피스럽고 더러운 기분으로 굽실거리기만 했다. 경찰서 문을 나설 때는 면회를 하지 못한 게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여관방에서의 낯선 잠자리며 자판 커피 이외에 변변히 음식물을 섭취한 기억이 없는 심한 공복감에 반하여 참을 만큼 참았던 강한 요의가 풀어진 긴장의 틈바구니를 통해 터질 것처럼 하체를 조였다. 낯 익은 곳에는 아직 화장실이라는 고상한 이름이 욕먹는 그 옛날의 변솟간이 그대로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옆 돌아볼 경황없이 뛰어들어 볼일을 다보고 나니 비로소 질척하게 괴어있는 바닥의 오물이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 가루가 푸슬푸슬 사그라져 내리는 비좁은 공간에 고리도 없는 널짝문은 곧 떨어져 나갈 듯 엉성궂게 매달려 있다. 게다가 고약한 냄새도 새삼스럽게 후각을 마비시키며 밀려들었다. 양지는 무릎에 놓았던 가방 끈을 입에 물고 대강 매무새를 고친 후 문을 열고 나오려다 멈칫했다. 다투듯 큰 소리로 무슨 이야긴가를 주고받으며 나이 든 남자 둘이 그녀가 열고 나갈 화장실 문 앞을 막고 들어왔다. 소변기 앞에 선 두 남자의 등에 걸려 문을 열 수 없을 만큼 화장실은 비좁았다.

양지는 숨을 죽이고 두 남자의 괴춤 여는 소리까지 듣고 있어야 했다. 찌푸린 눈길로 아무렇게나 갈겨 쓴 글씨와 광고 스티커가 들어왔다. 여종업원급구월수200만원외능력급유무경험자우대 달님싸롱. 막힌 곳 확 뚫어 줍니다. 성병 치질 상담.

힘살 좋게 쏟아지는 오줌소리와 함께 두 남자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얼 잔이나 취한 듯 부풀고 방만한 음성이 화장실 안을 울렸다.

“또 더듬수 놓지 말고, 뭘 모리모 가만히 있으라 안카더나. 가똑데이 똥장군 지고 상객걸음 따라나서드키 쏙쏙 나서들 말고”

“그란께 뭐꼬 말이다. 그쪽에는 뱃놈이나 왜놈들이 득시글댔응깨 고스란히 씨받이 한 택이고 최샌네는 알면서도 입을 봉창하고 가만히 있었단 말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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