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6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62)
  • 경남일보
  • 승인 2016.06.06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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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62)

“아아, 이 허망”

양지는 한동안 뜨거운 숨만 내쉬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들뜬 표정 한 번 해본 적 없이 잘 지탱하던 울화였다. 양지는 실핏줄이라도 터질 것 같이 부릅뜬 눈으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저 어둡고 깊은 내면은 도대체 얼마나 켜켜로 많은 것을 내장하고도 저토록 흔들림없이 태연한가. 미운 인형을 뜯어버리는 심정으로 배려 없이 불쑥 쏘아붙였다.

“엄마는 그럼 기철이 집이랑 우리 집 사이 그런 것도 다 알고 있었던 거지?”

전에 없던 양지의 패악에도 어머니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이미 굳은 각오라도 하고 있었던 듯, 담담한 표정 위에다 잔잔히 양지에 대한 연민만을 띄워 올렸다. 저 부러지지 않는 꼿꼿한 자세라니. 양지는 기가 질렸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가 쓰러지지 않으면 자신이 배겨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내친김이었다.

“엄마는 지금 호남이가 어떻게 돼있는지 알기나 해?!”

그러나 막상 소리를 질러 놓고 먼저 당황해진 것은 양지였다. 일격에 무너져 내리리라 기대했는데, 어머니는 그 천둥벌거숭이가 또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고, 한 마디 물어 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움직이던 손길조차 멈추었고 목상이라도 되어버린 듯 묵묵히 고개 숙인 채 미동하나 보이지 않았다.

양지는 헛짚은 제 실수로 인해 왱왱거리는 제 목소리의 울림으로 머릿속이 띵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낮고 차분한 어머니의 반응이 건너왔던 것이다.

“알고 있었더나?”

찍 소리도 못하고 숨이 멎을 듯 한 쪽은 오히려 양지였다. 도대체, 이 여인이 내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내 어머니가 맞는가. 양지는 자신이 어머니를 너무 환상적이고 상식적으로만 품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딸자식 많이 낳은, 죄도 아닌 죄를 멍에처럼 둘러쓰고 평생 얼굴 한 번 바로 들어보지 못한 채 삶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여기며 안쓰럽게 품어왔던 어머니. 양지는 몹시 허탈했다. 텅 빈 가슴으로 찌르르 아픔이 채워졌다. 어머니에게로 향했던, 자신이 갖고 있던 단 하나의 여린 정감이 이렇게 기만당하고 있었다니.

양지는 다시 정남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느냐고 캐묻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정남을 두 번 세 번 죽이면서 어머니까지 자기 입으로 죽이는 잔인함은 범할 수 없어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태어날 때부터 불쌍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던 그 아이. 양지는 기괴한 꿈속에서 놀아났던 것 같은 그 밤의 전후를 할 수 있다면 제 기억 속에서 깡그리 지우고 싶었다. 그러나 정남의 딸 수연이 살아있기 때문에 찍힌 필름처럼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장면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양지가 목격한 첫 번 째 장면은 정남을 가진 만삭의 어머니가 밭일을 할 때였다. 웬일인지 낫을 든 아버지도 그 날은 같이 풀을 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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