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70)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70)
  • 경남일보
  • 승인 2016.05.1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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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70)

같은 또래 만나서 얘기라도 나눠 볼 양이면 내일 모레는 시외갓댁 동서가 다니러 온다기는 하지만 동서는 벌써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셋이나 생산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우리 집 삼시랑님이 시새움 하시기를 바라고 자주 그런 자리를 만드시는 것 같으나 나로서는 정말 괴롭고 슬픈 날이 아닐 수 없다.―

갇혀 살던 한 새댁이 남에게 말 못할 일로 자신이 겪게 된 일들을 그저 나오는 한숨처럼 기술한 내용이었다. 그 무렵의 여인들이 땀땀이 익혔을 법한 궁체 언문은 그나마 흘림체였고 파손된 부분이 여러 곳 있었지만 묵혀져 있던 비서(秘書)에 버금하는 비탄은 충분히 함축되어 있었다. 더구나 내 집 윗대의, 말 못할 사연으로 억울한 삶을 살다간 한 할머니의 통한의 기록임이 분명한 만큼 양지는 값싼 흥분보다는 본인의 심금 곁으로 다가가 동류의 한 울림이 생기도록 접근해볼 필요를 느꼈다.

서간이나 내방가사로 겨우 명맥을 잇고 있던 옛 여인들의 문자생활에 대한 공부를 할 때마다 답답했던 학창시절이 있었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의 인내와 울분을 만약 글로 옮겨 놓을 수만 있었다면 태산이나 바다도 모자라 하늘까지 덮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란 담 밖을 몰라야 행복하다고 딸들은 훈육 받았다. 그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깨달은 행복의 진실은 그렇지 않음을 밝혀 딸들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던 몽매했던 어머니들….

양지의 친구 중 하나는 꽤 살만한 집 딸인데도 언니들이 모두 학교교육을 못 받아 한글마저 못 쓰는 문맹이라고 했다. 한 말에 벼슬도 했던 그녀의 증조부님은 언문을 아는 큰딸이 전해오는 편지마다 시집살이 고통이며 시집 험담만 늘어놓는데 격분하여 여자들의 학문은 가문의 이간이나 망신을 부른다고 단정하여 철저히 면학의 기회를 차단시켜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백세 장수하셨던 바깥어른들의 영향은 손녀딸들에게까지 내리 작용을 했다.

양지는 그때 우리의 조상들은 성급하고 비관적인 고정관념에 빠져 살았던 사람들일 것이라는 짐작을 했다.

그때의 친정아버지들이 만약 미래 세계에 대한 혜안이나 용기가 있었다면 딸들은 분명히 철부지 시절을 뉘우치며 친정 부모들에 대한 은공경이라도 지어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삶의 쓴맛을 본 다음에야 생에 대한 안목이 트인다고 했건만 장래에 대한 어두운 상상밖에 소지하지 못했던 선대의 부모들, 양지네의 경우도 사회적인 혼란에 시달린 사대부가의 슬픈 단면이라고 그나마 변명의 소지로 돌려지게 될 것이다.

먼 산의 나목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잦아들었다. 어둠으로 도배를 한 듯 칠흑뿐인 적막을 헤치고 어디선가 올빼미 소리가 들렸다. 슬프고 음울한 새의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고자 이 밤에 저런 소리를 낼까.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같이 한탄했던 경험이라도 있는지 어머니가 한 마디 했다

“저 놈의 올빼미가 어디서 또 왔이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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