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8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81)
  • 경남일보
  • 승인 2016.05.16 18: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81)

“이건 진짜 희극이다. 아부지는 또 뭐하는 짓인데. 모두 정신병자다. 나는 말이 안 나온다”

양지는 한 동안 언어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영화나 연극에서 또는 소설에서 씨받이에 관한 내용은 많이 보았다. 그러나 남의 집 일이거니 작품 속의 내용이거니 여겼던 것들이 바로 자신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 어이없고 실감 나지 않았다.

“언양 할무이 그 덕에 너그 아부지만 살판났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녕이 있다카더마 쓰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데끼, 잊어뿌리고 떤지두었던 그 땅을 이참에 산다는 사람이 안 나타났나. 너가부지 뱃장 좋은 양반은 맡기논 돈 내놓으란 듯 조으는 통에 애를 묵고 있던 판인데 눈이 번쩍 안띄이나”

약속했던 해산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남편의 성화에 시달리고 있던 참이었다.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 해서, 호남의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불상사를 접했지만 하루 이틀에 판결 날 일도 아니니 기회를 놓치기 전에 어머니는 언양 쪽부터 먼저 다녀오기로 했던 것이다.

염치도 좋지. 얼굴도 모르는 언양할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에 대한 양지의 비웃음은 더 확고해졌다. 확인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설사 추측대로 외간남자의 씨받이를 했다한들, 미물 취급을 당하고 살아야했던 여자의 운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가 있는 이상 충분히 언양할머니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짐작대로 최 씨가 아닌 생판 다른 종족의 피가 자신의 심장을 맴돌고 있다한들 이제와서 그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단지 아이 하나를 시어른들이 바라는 시기에 낳아 바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살림을 일으키고 아랫사람들을 잘 다스리는 등 그녀가 보인 탁월한 다른 능력은 모조리 무시당한 채 ‘식충이’니 ‘해 놓은 게 무엇’ 있느냐는 따위의 모멸스러운 호통을 듣고도 오기 세우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여자를 일러 잔꾀스럽기가 여우 이상이라고 한다. 명분 있는 결실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기도 하는 것은 남자만의 결기가 아니다. 또 바꾸어서 말하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식의 우연일 수도 있지않은가.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자기최면에도 불구하고 양지는 씁쓸했다. 참 미묘하고 복잡한 틈서리에 끼어서 생존의 뿌리를 내린 거였다. 나는 몰라,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아무리 부인을 해도 덤터기로 당한 곤욕은 앞으로 더 계속될 거라 싶으니 깨자분한 감이 가셔지지를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어디로 누구에게로 가서 그 해답을 듣나. 남의 후손이라는 것, 선택의 여지없이 점지 받은 혈연에 대해 회의를 품어야 하는 이 망연함은 어떻게 해소시킬까. 그 많은 가문들이 대단하게 여기고 받들던 족보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불확실성이며 기를 쓰고 그들이 받드는 족보라는 기록에 대한 허구까지.

“아이구 부끄럽고 복잡해, 왜 이렇게 남루하고 초라해. 너무너무 지겹다. 명자언니네는 또 뭔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