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81)
“이건 진짜 희극이다. 아부지는 또 뭐하는 짓인데. 모두 정신병자다. 나는 말이 안 나온다”
양지는 한 동안 언어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영화나 연극에서 또는 소설에서 씨받이에 관한 내용은 많이 보았다. 그러나 남의 집 일이거니 작품 속의 내용이거니 여겼던 것들이 바로 자신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 어이없고 실감 나지 않았다.
“언양 할무이 그 덕에 너그 아부지만 살판났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녕이 있다카더마 쓰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데끼, 잊어뿌리고 떤지두었던 그 땅을 이참에 산다는 사람이 안 나타났나. 너가부지 뱃장 좋은 양반은 맡기논 돈 내놓으란 듯 조으는 통에 애를 묵고 있던 판인데 눈이 번쩍 안띄이나”
염치도 좋지. 얼굴도 모르는 언양할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에 대한 양지의 비웃음은 더 확고해졌다. 확인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설사 추측대로 외간남자의 씨받이를 했다한들, 미물 취급을 당하고 살아야했던 여자의 운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가 있는 이상 충분히 언양할머니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짐작대로 최 씨가 아닌 생판 다른 종족의 피가 자신의 심장을 맴돌고 있다한들 이제와서 그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단지 아이 하나를 시어른들이 바라는 시기에 낳아 바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살림을 일으키고 아랫사람들을 잘 다스리는 등 그녀가 보인 탁월한 다른 능력은 모조리 무시당한 채 ‘식충이’니 ‘해 놓은 게 무엇’ 있느냐는 따위의 모멸스러운 호통을 듣고도 오기 세우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여자를 일러 잔꾀스럽기가 여우 이상이라고 한다. 명분 있는 결실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기도 하는 것은 남자만의 결기가 아니다. 또 바꾸어서 말하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식의 우연일 수도 있지않은가.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자기최면에도 불구하고 양지는 씁쓸했다. 참 미묘하고 복잡한 틈서리에 끼어서 생존의 뿌리를 내린 거였다. 나는 몰라,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아무리 부인을 해도 덤터기로 당한 곤욕은 앞으로 더 계속될 거라 싶으니 깨자분한 감이 가셔지지를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어디로 누구에게로 가서 그 해답을 듣나. 남의 후손이라는 것, 선택의 여지없이 점지 받은 혈연에 대해 회의를 품어야 하는 이 망연함은 어떻게 해소시킬까. 그 많은 가문들이 대단하게 여기고 받들던 족보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불확실성이며 기를 쓰고 그들이 받드는 족보라는 기록에 대한 허구까지.
“아이구 부끄럽고 복잡해, 왜 이렇게 남루하고 초라해. 너무너무 지겹다. 명자언니네는 또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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