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8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82)
  • 경남일보
  • 승인 2016.05.16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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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1 (182)

양지가 짜증을 내며 고개를 가로젓자 어머니가 위로를 했다.

“아이고 나도 모리겄다. 변명을 하자모 입이 쑵고 단내가 난다. 글치만 누대로 울리고 살든 집 곳간에는 썩어나는 물건도 지천이라꼬, 사람살이가 우찌 해맑기만 하겄노. 자기들 살아온 역사를 생각하믄 쪼끔 시끄럽고 복잡한 게 제격이겄제. 글치만 인자는 옛날캉 달라서 핏줄 찾고 양반 성씨 뜯어 묵고 사는 것도 아닝깨 차츰 잊어지고 묻어지겄제”

양지가 이해 못하는 방식으로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와 자신이 지킨 가문을 두둔해서 딸들의 빈축을 샀지만 그에 대한 자기변명을 한 적은 없다. 연변에 살아있다는 노인이 오면 어떤 일이 있을지 어머니는 아직 귀띔 받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정씨로 쓰던 호적장부의 성을 최 씨로 갈면서 명자언니 그들이 퍼뜨린 사연은 또 천지사방이 떠들썩하게 분탕치며 흘러 다닐 것이다. 양지는 멍하니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듯 대꾸도 하지 않았다. 똑각, 똑각, 똑깍, 똑깍, 새겨서 듣고 있으면 마디가 여간 딱딱하지도 않은데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계 소리가 하염없이 흘러가는 긴 세월의 숨소리처럼 고즈넉한 분위기를 한땀 한땀 이어붙이고 있다.

진보도 생산성 있는 것도 아닌 지난 일에 그토록 생각을 앗겨야만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지는 어머니가 들어도 그만인 혼자 소리를 냈다.

“내일은 그냥 가야겠어”

“와? 발도 다 안나샀는디 걸을 수나 있것나? 호냄이도 만내 본담서”

“·····”

해명이 필요했지만 어머니의 의문에 찬 시선을 무시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면서 얼굴만 보면 뭘 해. 괜히 나까지 비참해지긴 싫어. 왜 그렇게 솔직히 못 밝히는지, 양지는 그저 자리에 누웠다. 대답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시선을 얼굴에다 느꼈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싫기만 했다.



양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어머니가 놓아 준 가죽부츠를 꿰어 신는다. 허벅지게 내린 무서리가 두엄밭과 텃밭을 솜처럼 하얗게 덮고 있었다. 어디 난 서릿바람이라 더니. 몰려 온 아침 바람이 삭신을 저미고 들어 따뜻한 이불 속으로 되돌아가 묻히고 싶게 했다. 애써 그런 미련을 떨쳐버리며 약해지려는 자신에게 최면술사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 가야한다, 가야한다…. 그 순간, 문득 눈이 떠졌다.

칠흑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무슨 냄새일까. 작은 움직임도 느껴졌다. 의식이 명료하게 도운 것은 전혀 생소한 어떤 냄새였다. 아니, 은밀한 어떤 기척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었지? 생각의 끄나풀을 톺아가고 있는데 다시 가만한 움직임이 옆에서 일었다. 도둑이 들었구나. 혼자 살아 버릇한 사람의 직감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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