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8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86)
  • 경남일보
  • 승인 2016.05.1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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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86)

딸, 며느리, 나름대로 짐작하는 눈치를 보이며 무언가를 진료카드의 공란에다 적고 있던 의사가 돌연히 펜을 멈추며 양지를 쏘아보았다.

“어떻게 저 상태가 되도록 환자를 방치했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드러내며 펜으로 꼭꼭 점을 찍고 있던 의사는 자신이 적어놓은 문자 위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말라 비뚤어진 지렁이가 저랬었지. 양지는 해독 불가능하리라 여기면서도 시선이 닿는 대로 의사의 펜 끝에서 꼬물거리는 글줄을 따라갔다. 캐앤서? 문자를 해득한 뒤 굳어지는 양지의 표정을 보며 의사는 또 모멸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확실한 결과는 정밀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전이도 의심되는 상태니까 서둘러서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 첨단과학 시대라는 말 몰라요? 딸인지 며느린지 젊은 사람이 어쩜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어요?”

“캐앤서······라면?”

순간적으로 의사의 고개가 홱 돌려졌다. 보호자가 함부로 휘갈겨 놓은 영문을 해독 가능한 수준이라는 점에 더 기분 나쁜 표정이 되었다. 의사는 인술의 친절함이 싹 가신 얼굴로 의사보다 더 많은 상식대로 알아서 하라는 듯 퉁명스럽달 수 밖에 없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알 만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서, 딱하군요. 어서 큰 병원으로 모시고 가세요”

더 이상 상대할 기분 아니라는 듯 처리 된 서류를 냉정히 밀어놓고, 뭐라고 혼자 소리로 중얼거린 의사는 빙글 회전의자를 돌려 앉으며 다음 환자를 불렀다.

병명을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대단히 크고 무서운 병의 말기를 의사는 암시했다. 양지는 가슴이 미여지는 듯했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굳이 사전을 들추어 볼 필요도 없었다. 서른다섯 살이 되도록 산부인과와는 무관하게 살아왔지만 그녀도 이제 먹을 만큼 먹은 나이의 주인이다. 본인이 들을까봐 병명을 입에 올리는 것은 삼갔지만 하나의 귀착점으로 자연스럽게 내려지던 결론. 어둡고, 차가운 나락 앞에 어머니가 쓸쓸히 혼자 서 있음을 의사는 말한 것이다. 양지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마른침을 삼켰다. 북받치는 감정대로 자신을 흩뜨려서는 안 될 때였다.

“우리 선생님, 저러신 분 아닌데 화가 많이 나셨나봐요. 이해하세요. 자궁암은 다른 암에 비해서 치유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까 선생님께 한 번 더 말씀해보세요. 잘 아시는 큰 병원 의사선생님도 소개해 주실 텐데요”

참담한 생각으로 굳어있는 양지의 모습이 안됐던지 진료실의 간호사가 다가와서 양지에게 일러 주었다.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진찰결과에 대한 놀라움보다 의사가 보이는 멸시에 대한 모멸감 때문에 더 전반적 문제를 설명 듣고 묻는 것도 잊어버리고 물러나왔던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그러나 양지는 의사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어디 다른 데로 가서 한 번 더 진찰을 받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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