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95)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95)
  • 경남일보
  • 승인 2016.05.1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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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2 (195)

양지는 목소리에다 심을 넣으며 현태를 쏘아보았다.

“내가 이성을 잃으면 누가 내 일을 대신해 줄 거야? 울어도 소용없는 일은 울고만 있어선 안 돼. 나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일을 처리하고 처신을 해야 될지 그게 급선무지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어. 세상에,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내 엄마냐고 아무리 울부짖어 봐도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

“그래서 같이 나누자는 것 아냐, 동지가 되어서 말이야!”

여자에 대한 남자의 이중심리를 이미 알아버린 이상 양지의 결심은 해체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향에까지 찾아온 좋은 친구를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다.

“고마워 현태 씨. 하지만 나는 현태 씨가 생각하듯 감정의 사치조차 부릴 여유가 없어. 나를 현태 씨가 어떻게 생각해 주는지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솟구칠 정도로 내 감정도 뜨거워져. 그냥 결혼해서 보호받으며 살아버리고 싶기도 하고”

“봐, 내가 뭐랬어. 그게 여자들의 속성인 거야. 나이가 아직 어려서? 목표한 적금 액수가 아직 덜 차서? 껍질을 깨고 과감히 박차고 나와. 내게 기울어져 보란 말이야. 난 좋은 직장을 갖지도 못했고 형제 많은 집 장남이야. 글치만 남자로서 내 여자 하나 밥 안 굶길 자신은 있다”

양지는 밀려드는 격정을 숨기기 위해 둥그렇게 솟아있는 묫등을 돌아 노송이 기울어져있는 곳으로 갔다. 할 수만 있다면 어린애처럼 단순하게 현태의 이끌림에 따르고 싶었다. 그가 있음에 한 없이 든든했다. 때로는 혼미할 정도로 그의 향기로운 체취에 취했던 적도 있었다. 그의 눈빛이 그물망처럼 끼쳐 올 때면 숨 쉴 수도 없이 전율하는 몸이 파멸할 듯 저 혼자 끓기도 했다. 자신을 앗기는 순간부터 초라한 종속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판단은 미숙한 독단일 수도 있으리라. 더러 나무람을 당하고 자존심 상하는 순간도 없지 않을 것이지만 그런 것 모두를 털털 털어버리고 기대도 환상도 없이 살아간다면 이외로 편하게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지는 그러지를 못한다.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하지만 현태는 양지의 그런 모순스런 중심사상을 간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현태가 느낀 양지의 이중심리는 아마 자취방으로 정남을 데리러 갔다가 어린동생에게 내침을 받은 충격으로 돌아와서 양지가 보인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생에게서, 그것도 아직 어린애라 여겼던 정남에게서 거부를 당함이란 신뢰감 상실에 따른 자괴와 맞닿아있다. 언니 노릇은 이름만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엇이건대, 그들 위에 있다는 당치도 않는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을까.

양지는 그날 현태를 만났다. 동생이 나를 버리고 떠났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슴이 마구 아렸다. 술을 마셨고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몸을 흔들었고 발목이 아프도록 거리를 걸었다. 눈을 떠보니, 무심결에 몸을 뒤채다보니 따뜻함이 옆에 닿았다.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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