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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산플러스 <150>곡성 봉두산이름도 고운 능파각 건너엔 탑으로 세운 전쟁의 흔적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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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10  16: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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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록의 산 봉두산.


‘잘못 온 건가?’ 산 초입에서 발길이 멈췄다. 곡성 봉두산에 가려고 왔는데 정작 산으로 가는 길목 태안사 일주문 편액에 ‘桐裏山泰安寺(동리산태안사)’가 새겨져 있었다. 출발 전 관련 자료를 봤지만 동리산이라는 글귀를 대하고보니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봉두산(鳳頭山·해발 754m)은 주변 산세의 최고점이라 하여 봉황의 머리, 즉 ‘봉두산’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동리산이 된 이유는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는데 아마도 산 주변의 삶터가 ‘오동나무 속처럼 살기 좋다’는 뜻으로 한자 오동나무 동(桐)을 썼다는 설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즉 예부터 동리산이라고 불렸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봉두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태안사는 742년(신라 경덕왕)창건돼 송광ㆍ화엄사의 본산역할을 했다.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28년까지 대안사였지만 이후 태안사로 불렸다.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 비문에 ‘수많은 봉우리, 맑은 물줄기가 그윽하고 깊으며, 길은 멀리 아득해 세속의 무리들이 머물기에 고요하다. 용이 깃들이고 독충과 뱀이 없으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해 심성을 닦고 기르는 데 마땅한 곳’이라고 새겨져 있다. 고승 적인선사는 어릴 때부터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고 절에 자주 오갔다. 15세에 출가해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했다. 당에 유학해 지장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 태안사 대웅전


▲등산로, 태안사 주차장→태안사 입구→성기암 갈림길→외사리재→외동골→산소→넙적 바위→봉두산 정상→하산→계곡→태안사 회귀.

▲오전 9시 53분, 곡성 태안사 입구에서 1인 15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취재차 왔다’는 사유를 전하자 무료입장을 시켜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두 번 했다. 5분 정도 차를 더 몰아 사찰 주차장에 도착한다. 걸어가면서 풍광을 즐겨야 할 아름다운 길이었다.

오른쪽 계곡을 가로질러 세운 정자는 한여름 스님들의 휴식처로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자에 앉아 있는 스님 엉덩이 밑으로 시원한 폭포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을 뜻하는 능파각(凌波閣)이다. 절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다리건물이다. 850년 통일신라 혜철선사가 지은 후 파손된 것을 1767년 조선 영조 때 복원한 뒤 1981년 전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이를 지날 때 세속의 번뇌를 놓고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것을 상징한다.

능파각을 지나 경찰 충혼탑. 한국전쟁 시 인민군이 남침하자 한정일 곡성서장과 300여명의 경찰은 방어를 위해 봉두산 기슭 태안사에 작전지휘본부를 설치했다. 순천에 주둔 중인 인민군 기갑대가 남원으로 이동하기 위해 곡성 압록교를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부근에 매복전을 펼쳐 적을 섬멸하는 전과를 세운다. 그러나 8월 6일 새벽, 북한군은 태안사 작전지휘본부를 기습해 경찰관 48명이 전사했다. 1985년 고인들의 넑을 기리기 위해 충혼탑을 세웠다.

 
   
▲ 부도탑군. 윤다의 부도 광자대사탑(274호·중앙)과 광자대사탑비(보물275호·오른쪽)


오전 10시, 태안사 입구서 절로 향하지 않고 오른쪽 옛길로 오르다보면 키가 크고 세력이 왕성한 수목의 산길이 나온다. 부속암자인 성기암 갈림길을 지나 본격적으로 오름길에 들면 10분 만에 외사리재다. 정상까지는 2㎞가 남은 지점이다.

이 산에는 구간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 이를테면 큰소나무 밑, 큰바위 옆, 산소 부근, 이런식인데 고도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줘 도움이 된다.

 
   
▲ 달걀버섯.
오전 11시, 봉두산 정상 400m 남긴 지점인 외동골에 닿는다. 30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 탓에 지난 봄 움을 틔웠던 연초록 잎이 어느새 진녹색으로 변했다. 어떤 나뭇가지는 이파리가 언뜻언뜻 붉은 단풍으로 물들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습한 날씨도 산을 풍요롭게 했다. 갖가지 형상의 버섯들이 볼록볼록 땅을 비집고 올라와 얼굴을 내밀었다. 그중 모양과 색깔이 예쁜 버섯에 눈길이 갔다. 갓이 계란처럼 생겼는데 실제 이름도 달걀버섯이다. 식용 가능한 버섯으로 오렌지색을 띤다. 고대 로마시대 네로 황제가 좋아한 버섯이라고 한다. 그는 달걀버섯을 진상하면 무게만큼 황금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제왕버섯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길은 해발 715m, 넙적 바위 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이어진다.

낮 12시, 정상에 닿는다. 헬기장인 정상은 주변 나무들로 인해 조망이 별로 없으나 숲을 비집고 보면 동으로 승주 들녘, 북동쪽으로 구례와 섬진강 그리고 그 건너 지리산이다.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동쪽 산 아래. 석산개발로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O광업인데 온 산이 파헤쳐져 붉은 황토 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휴식 후 봉성마을(5.4㎞)방향을 뒤로하고 서쪽능선을 타고 태안사 2.4㎞ 하산 길에 들었다. 정상을 떠난 지 30여분이면 태안사 쪽으로 빠지는 골짜기 길로 접어든다. 숲은 울창하다. 소나무 단풍나무 고로쇠나무 등 아름드리 숲이 작은 계곡과 어울려 있다.

‘맨발로 걷고 싶다’는 충동이 생길 정도의 흙길이다. 마음이 정한해진다. 숲의 맑은 기운에 일상의 잡사마저도 말끔히 떨쳐낼 수 있을 듯 청징하다.

후줄근한 땀이 온 몸을 적셔도 끈적이는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은 금세 시원한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에 닿았기 때문이다.

체면 불구하고 옷을 입은 채 뜨거워진 머리를 물속에 들이미는 기분은 세상 어느 시원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을 뜻하는 ‘능파’ 라는 이름을 가진 금강문 아래에 맑고 청정한 물이 흘러간다.


오후 2시 20분, 바람 길을 따라 숲을 빠져 나오면 고풍스런 태안사가 나온다. 이 절은 전남 문화재자료 23호로 신라 경덕왕 742년 승려 세 명이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그 뒤 1대조사 혜철선사가 당나라 서당지장에게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와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개창했다. 조선 초 태종의 둘째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무르고 완당을 건축했으며 큰바라를 만들고 완당완기를 남겼다.

정유재란과 한국전쟁으로 대웅전이 불타는 등 피해를 크게 입었다. 일주문과 능파각 보세루 미타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은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혜철 부도인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보물 273호), 윤다의 부도 광자대사탑(274호), 광자대사탑비(보물275호), 태안사 대바라, 동종, 삼층석탑 등 보물 5점과 지방문화재 4점이 있다.

승탑(부도)는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의 부도로 고려 광종원년에 세워졌다. 상하 비례가 조화를 이뤄 우아하고 정교하며 상륜부조각이 매우 우수하다. 시기적으로 앞선 적인선사탑 형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 옆에 공자대사 탑비는 부릅뜬 용의 눈, 납작한 코, 길게 찢어진 입이 해학적이다.

일주문을 빠져 나오면 가람에 실내체육관 크기의 연못이 조성돼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둬 연못을 만들고 또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삼층탑(전남문화재 170호)을 세웠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다리를 건너 접근할 수 있는데 피안의 세계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으로 알려져 있다.

철철 거리며 떨어지는 연못 배수로 옆으로 돌아 나오면 다시 우람한 숲이다. 오를 때는 보지 못했던 거목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용케도 살아남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태안사를 안온하게 감싸고 있다.

원점 회귀했을 때 주차장에는 햇볕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짙은 그늘이 돼 있었다. 오후 3시.

최창민기자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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