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3 (216)
그들은 유림들을 초청해 놓고 선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회를 열고 뜨르르 구종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아들 손자며느리 사돈 팔촌까지 기구스럽게 세를 과시하며 살던 향수를 망향객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근방에서 누구라면 이름만 들먹여도 존경해 마지않던 그 옛날의 영화롭던 시절로 세월을 돌려놓기로 열망해 마지않았던 집착. 홀아비로, 또는 해마다 피폐해지는 외롭고 빈궁한 가세를 거듭되는 전란의 피해로만 여기지 않고 다른 해석을 했다. 대밭이 망하는 것과 손이 안나는 것을 동일시 해서 남손이 무진장 많이 나서 울울창창 대나무숲처럼 번성해 주기를 기원하며 정성 들여 대밭을 돌보았던 것이다.
어이없이도 그들의 졸보기 시야에서 최 씨 가를 망가뜨리는 요물은 칡이 되었고 그 칡은 다시 여자로 환치되는 모순에 모순은 거듭되었다.
할아버지는 그 여름에도 노상 대밭에서 살며 칡넝쿨 제거작업에 몰두했다.
“아부지 나도 퉁소 한 개 맹글어 주이소 예?”
앞에서 알짱거리던 어린 아들의 입을 통해서 딸의 비밀은 그렇게 누설되었더랬다. 고종과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토대로 어머니가 전해주었던 사연이다.
“퉁소라꼬?”
‘타동네 총각이 이 동네 어느 처녀를 만나러 오는 신호라더라. 그들은 밤마다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다가 다음 날 만날 것을 약속하며 애달프게 헤어진다더라’
실제로 전날 저녁에는 할아버지 자신도 자다가 깨어 임을 그리며 헤매 도는 듯 한 그 애절한 가락의 퉁소 소리를 들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에잇, 세상이 흉흉하니까 별 해괴망측한 일도 다 있구만’
공연히 헛기침을 토해내며 집을 한 바퀴 순라 돌았으며 댓돌에 나란히 놓인 딸 화진의 신발을 더듬어서 확인하고는 안심하고 다시 베개를 높이 고이며 편히 돌아누웠던 것까지.
“에라이, 사위스럽게. 그런 건 광대들이나 하지 너 같은 양반집 도령은 가까이 할 물건이 아니니라”
할아버지는 참으로 무심한 대꾸를 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의 입에서는 아버지가 딛고 선 땅이 천야만야로 함몰되는 충격을 주고도 남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누님도 갖고 있는데”
양지는 그 부분을 회상할 때 언뜻 전신으로 뻗어 가는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어루만지기만 해도 느낄 수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의 통로였을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런 정표 하나쯤 나눠 갖고 싶은 것은 신구시대를 막론하고 연인관계의 남녀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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