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3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31)
  • 경남일보
  • 승인 2016.09.11 22: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31)

“저기 저 아가씨 있재? 까만 바지에 노란 쉐타 입은 사람, 저 아가씨는 차곡차곡 월급을 모아서 집에다 보내는데 소도 사서 기르고 그 소를 팔아서 동생들 학비도 한단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머슴살이 하던 자기 아부지한테 논밭을 사드맀는데 올해는 농사가 잘돼서 기분이 좋았다고 떡을 해 와서 갈라 묵었단다. 여기 있는 사람들 보면 그 동안에 나는 뭘 했는고 싶다. 나도 좀 일찍 이런 데로 눈을 돌맀시모 벌써 직수가 돼도 됐을 긴데”

명자언니의 기회를 놓친 아쉬움을 전해들은 언니도 마냥 조바심했다. 가시나하고 사기그릇은 내돌리면 깨진다는 것을 철칙으로 아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만은 아무래도 자신 없었다. 기술자라고 젠체하는 나이 어린 아가씨 밑에서 수치심을 무릅쓰고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배우는 것 보다 더 어려운 벽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니의 관심은 줄곧 명자언니가 다니는 방직공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기 창가에 있는 처녀는 지 손으로 벌어서 중학교 졸업하고 다시 고등학교 갈라꼬 밤잠도 안자고 잔업을 한단다. 잔업은 낮일보다 특별수당이 더 많단다”

소곤거리는 성남언니의 말을 듣고 있는데 저쪽에서 명자언니와 한 조가 되어 일하던 순이라는 처녀가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낮고 은밀했다.

“넌 아직 기술도 덜 배웠는디 기술자라 캤다가 들통나모 우짤라꼬”

“인마야, 자리 옮길 때는 다 그카고 들어간다. 여어서 본대로 눈치로 때리모 사흘 안에 직수 된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와 높아진 보수로 들떠 있던 그 아가씨의 말소리에 돌연 물기가 어렸다.

“나도 김 기사님 배신하고 싶은 심정은 아이다만, 이번 달에는 아부지 약값이 엄청 더 많이 든다. 재욱이 월사금도 밀렸고-. 우짜는 수 없다. 니가 말 좀 잘해 도오”

“야야, 겨우 손 맞촤 놨더마 나는 그라모 우짤끼고”

“니는 내가 자리 잡히모 델꼬 가께. 니는 우선에 니 친구랑 같이 하모 안 되나”

명자언니의 또 다른 걱정에 그 아가씨는 뜻있는 눈길을 구경 와 있던 성남언니에게로 돌렸다. 그렇게 언니의 도약은 부추겨졌다. 그렇잖아도 자립하고 싶었던 언니였다. 아니, 나는 안 돼. 준비 안 된 목소리로 언니가 대답을 했다. 그러나 언니의 가출은 그때 이미 비어있는 자리를 염두에 두고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여자의 몸은 작고 가냘프다. 그러나 끈질긴 근면성은 식물의 잔뿌리처럼 그악스럽다. 깊이 팬 가정 경제의 한 부분을 메우는데 기여하는 그들의 열정은 개미군단을 연상케 한다. 타고난 모성적 본능 아니면 불가능할 희생적이고 비극적인 투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