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4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44)
  • 경남일보
  • 승인 2016.09.1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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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4 (244)

그 사람 마음 아픈 것 원치 않는다 하면 누구든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거짓 소문을 갖고 동조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양지는 그런 감정을 오래 끼고 있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떻다는 건가. 아버지의 장부일언을 되뇌이던 어머니의 미욱한 절개만 안타까울 뿐.

우무처럼 고여 있는 둘 사이의 침묵을 깨고 오빠가 낮게 말했다.

“외숙모님한테는 그렇게 전하라고 하시길래, 그렇게까지 거짓말 안 해도 충분히 감내하실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대화는 더 이어질 것이 없었다. 고종오빠도 그녀도 아직 서로를 잘 몰랐으며 풍부한 대화를 나눌 만큼 공유하고 있는 정서가 빈약했다. 더구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유로 양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없었다. 약간 서먹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고 있던 고종오빠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양지는 혼자 바깥마당에 남았다.

방이며 마루는 물론 상기둥 옆에도 여러 자루의 양초가 대낮처럼 밝혀져있다. 게다가 화톳불까지 넘실거리니 처마 밑에 둘러쳐진 한지로 오린 꽃과 귀면들이 두둥실 기와지붕을 떠받들고 천상으로 둥둥 떠올라 가는 것처럼 환상적이다.

그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무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양지는 마당가의 향나무 밑으로 가 거기 놓여 있는 운두가 깨어진 절구통에 걸터앉았다.

‘언니, 성남언니. 큰언니’

그녀는 다시 한 번 가슴속에 고여 있는 정감을 녹여 언니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따뜻한 아랫목 자리에다 양지를 뉘여 놓고 들여다보며 언니는 언제나 세상에 다시없을 보물을 만지듯이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참 눈이 맑고 깊었다. ‘쾌남아, 쾌남아, 부르며 어르던 목소리도 포근하고 달콤했다. 아, 그 때 그 순간, 따뜻하고 든든했던 언니의 사랑이여. 언니를 생각해 보고 애오라지 그녀의 생각에 잠겨 보는 것도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다.

병든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며 불구로 태어난 정남의 딸,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작성해서 올린 탄원서 덕분으로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 같은 전망이 있다지만 결코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은 호남이, 아무런 생활대책도 없이 덜렁 자식만 하나 얻어 놓은 아버지…. 이제는 아무리 모른 척하고 외면한다 해도 마음이 먼저 무거워서 나 몰라라 수 없는 피붙이들.

사무치게 언니가 그리워졌다. 이렇게 외롭고 괴로울 때 부르고 손잡으며 체온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살아서 이름만 빌려주어도 얼마나 큰 힘이 될 텐데. 불현듯 코끝이 따가워지며 뼛속깊이 절절한 외로움이 스며들었다. 언니…. 양지는 어둠보다 더 깊은 영원 속에 침묵으로 잠겨 있는 언니의 유해를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눈물을 닦았다. 뜨거운 눈물은 참을 수없이 자꾸자꾸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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