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예술계 ‘거목’…본사 주필·사장 역임
제66회 개천예술제 기간인 지난 4일 진주성 내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앞 무대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개천예술제 창제 주역인 파성(巴城) 설창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 것이다. 참석자들은 예술 대중화에 헌신한 고인의 업적을 기리고 개천예술제의 역사를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창간 107주년을 맞은 본보에서는개천예술제 창제주역이자 본사 사장을 지낸 설창수 선생의 탄생 100주년에 즈음해 그의 일생과 삶을 되짚어본다.
◇개천예술제 만들다=파성은 진주 예술인들과 함께 지난 1949년 11월 22일 ‘제1회 영남예술제(1959년 개천예술제로 개명)’를 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15일)이후 자주독립 1주년을 기리고 지역 예술문화 발전을 위해 마련됐다.
개천예술제는 태동부터 경남일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당시 본사 주필이었던 설창수 선생이 대회장과 위원장을 맡았다. 주최는 문총 진주지부였지만 실무는 경남일보 직원들이 다 맡아서 했다. 경남일보에 재직 중인 문총 회원들이 많았을뿐만 아니라 설창수 주필이 행사일을 총괄했기 때문에 전 사원이 동원됐다. 이후 11회 개천예술제(1960년)까지 설창수 선생이 주축이 돼 경남일보가 대회경비를 포함한 모든 지원을 했다.
◇예술문화의 선구자=파성은 1916년 1월 16일 창원에서 태어났다. 1937년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해 1942년 니혼대학 법문학부 예술과를 중퇴했다. 대학 재학 당시 일제에 사상범으로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지난 1946년 3월 기자로 입사해 9월 주필을 맡아 오다 문교부 예술과장을 잠시 지내기도 했다. 1951년 다시 본사 주필을 맡은 파성은 1952년 본사 사장에 취임했다.
1947년에는 국내 최초 문단인 영남문학회를 창설해 도내 문단의 기틀을 잡았다. 진주시인협회가 모태가 돼 결성된 영남문학회는 전란 중 메마른 지역민의 정서를 순화하기 위해 경남일보에 매일 시와 수필을 실었다. 글을 쓴 문인들은 국내 문단에 내노라하는 거장들이 많았다.
파성은 1951년 이후 전국을 돌며 223회의 시화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다. 생애 700여 편의 시와 100여 편의 수필, 8편의 희곡을 남기는 등 지역 문화예술계 선구자의 길을 걸었다. 짙은 역사의식 속에서 탈주지(脫主知)주의적 정신주의를 추구하는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정치인이라는 특이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총선에서 6년 임기의 초대 참의원에 당선됐다. 선거에서 차점자와 2배이상의 표차가 났는데 당시 경남일보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과 지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참의원 생활은 당선 이듬해에 일어난 5·16군사혁명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9개월만에 접었다. 이후 군사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사설과 기사를 통해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고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1998년 6월 향년 83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영면에 들었다. 생전에 제1회 눌원 문화상을 비롯해 진주시 문화상, 대통령 표창, 건국훈장 애족장, 은관문화훈장, 예총 예술대상, 향토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1990년부터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는 ‘파성문학상‘이 제정돼 후배 예술인을 배출하고 있다.
박철홍기자 bigpen@gnnews.co.kr
◇개천예술제 만들다=파성은 진주 예술인들과 함께 지난 1949년 11월 22일 ‘제1회 영남예술제(1959년 개천예술제로 개명)’를 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15일)이후 자주독립 1주년을 기리고 지역 예술문화 발전을 위해 마련됐다.
개천예술제는 태동부터 경남일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당시 본사 주필이었던 설창수 선생이 대회장과 위원장을 맡았다. 주최는 문총 진주지부였지만 실무는 경남일보 직원들이 다 맡아서 했다. 경남일보에 재직 중인 문총 회원들이 많았을뿐만 아니라 설창수 주필이 행사일을 총괄했기 때문에 전 사원이 동원됐다. 이후 11회 개천예술제(1960년)까지 설창수 선생이 주축이 돼 경남일보가 대회경비를 포함한 모든 지원을 했다.
◇예술문화의 선구자=파성은 1916년 1월 16일 창원에서 태어났다. 1937년 진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해 1942년 니혼대학 법문학부 예술과를 중퇴했다. 대학 재학 당시 일제에 사상범으로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지난 1946년 3월 기자로 입사해 9월 주필을 맡아 오다 문교부 예술과장을 잠시 지내기도 했다. 1951년 다시 본사 주필을 맡은 파성은 1952년 본사 사장에 취임했다.
파성은 1951년 이후 전국을 돌며 223회의 시화전을 개최하는 등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다. 생애 700여 편의 시와 100여 편의 수필, 8편의 희곡을 남기는 등 지역 문화예술계 선구자의 길을 걸었다. 짙은 역사의식 속에서 탈주지(脫主知)주의적 정신주의를 추구하는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정치인이라는 특이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총선에서 6년 임기의 초대 참의원에 당선됐다. 선거에서 차점자와 2배이상의 표차가 났는데 당시 경남일보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과 지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참의원 생활은 당선 이듬해에 일어난 5·16군사혁명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9개월만에 접었다. 이후 군사정권과 타협하지 않고 사설과 기사를 통해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고 부정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1998년 6월 향년 83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영면에 들었다. 생전에 제1회 눌원 문화상을 비롯해 진주시 문화상, 대통령 표창, 건국훈장 애족장, 은관문화훈장, 예총 예술대상, 향토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1990년부터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는 ‘파성문학상‘이 제정돼 후배 예술인을 배출하고 있다.
박철홍기자 bigpe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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