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3)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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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3)

그러나 이해 받지 못하고 호응하는 동지도 없는 외로운 공간에서 그녀의 몸부림은 바람난 계집아이의 미치광이 발악으로 밖에 인정받지 못했다. 남성을 능가하는 재능이 있어도 수동적이고 순종적이게 교육시켜놓고 생산과 노동력을 얻기 위해 수종처럼 여자를 닦달했던 남자, 아버지가 건재한 이 완고한 사대부가의 세습된 풍습에 눌린 채.

양지는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의 대열로 발돋움한다는, 눈부신 국가 발전의 예찬을 방송이나 신문으로 접할 때면 어린 시절에 보았던 방직공장의 풍경을 떠올렸다. 노랗게 핏기 없는 얼굴로 베틀을 지키고 있던 아가씨들.

‘우리 아부지 또 소 한 마리를 샀단다. 우리 동생 학비하고 하숙비 보내야 된다’

제몫으로는 화장품 하나, 여럿이 둘러앉아서 먹는 풀빵내기 모꼬지 하나에도 인색하게 굴던 언니들. 주린 배를 홀쳐매고 더러는 각혈을 하면서도 남동생이나 오빠의 학비를 대고 집에다 논밭을 사주는 것을 보람으로 살던 언니들. 가족들의 윤택한 삶에 밑거름이 되고자 경제발전의 그늘에서 소진시킨 딸이나 누나들의 젊음을 이 땅의 아버지나 아들들은 얼마나 양심적인 행위로 보답하고 있을까.

양지는 그 무렵부터 만고불변의 법칙처럼 확고하게 굳어있던 이 땅의 남존여비 사상이 본격적인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음을 목격했다. 신체적인 조건이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데 불리했을 뿐이지 여자들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집념과 끈기는 남자들보다 월등 우수한 것이 여성의 본질이다. 그러함에도 오랫동안 구축되어 온 구조적인 모순과 관습의 압박으로 여성성의 장점은 빈사직전의 연명을 해 온 거나 다름이 없다. 지금도 사회적인 부조리에 맞서 불나비처럼 희생을 감수하는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사회생활의 단명이나 같잖게 나댄다는 망언의 돌팔매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사회가 조금씩 변화되고 있는 것은 어린 쾌남의 느낌에도 감지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안타깝게 언니가 보고 싶다. 아버지가 조금만 허위스러운 근엄의 계단에서 내려와 언니의 손을 잡아 주었던들 집안이 이렇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니 잘 가. 극락이 정말 있다면 극락으로 가고, 천당이 정말 있다면 천당으로 가고 언니 가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훨훨 날아가. 거추장스러운 육신의 허물도 벗어버렸으니 마음대로 못할 게 뭐 있어.”

마치 언니가 옆에서 동행하고 있는 듯 양지는 소리 나게 말하며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주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으로 닦는데 어디선가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가 좋아하는 과자는 무엇이었던가, 새삼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가게는 멀었다. 바람은 불고 어두운 길거리에서 상점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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