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9)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9)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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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59)

넋 나간 듯 멍하니 이 살풍경을 보고 있던 양지는 몇 발자국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다 부러진 말뚝처럼 외로 넘어져 버렸다. 마침 곁에 있던 고종오빠가 양지를 부축해 일으켰다. 정신을 잃은 양지의 뺨을 두드리며 오빠가 나무랐다.

“동생, 동생. 정신 차려야지! 외숙님도 계신데 자네가 이러면 되나”

수런거리며 사람들이 주위로 모여들었고 누군가 찬물을 얼굴에다 끼얹었다. 양지는 아득하게 열린 시선으로 차갑게 높이 떠있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제사 맞춰보니 외숙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숙모님이 이런 일 저런 일을 나한테 모두 부탁하시던 게 좀 유난스럽다 싶었는데…. 숙모님은 미리 계획하고 일을 추진해 오셨던 거다. 굿을 하고 싶다고 병원을 나오신 것부터-”

양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목격하게 될 이 엄청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양지는 눈을 뜨고 밝은 해를 볼 염치가 없었다. 어머니의 침착하고 신중한 성품을 얼마나 경멸하며 건방지게 되받았던가.

돌이켜 보니 그게 조짐이었다 싶은 일들이 양지 자신에게도 더러 집혀 나오고 있었다.

엊그제 집으로 왔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문병 온 마을 아주머니들로 한 방 가득 사람이 들어찼었다. 수 십 년 미루어진 남강다목적댐이 완공되어 진양호에 담수가 시작될 때 뿔뿔이 흩어졌던 어머니의 이웃친구들이었다. 본의 아닌 실향민이 되어 어디다 다시 마음의 뿌리를 내리고 살까 싶었지만 떠나지 않으면 안 될 때 그들은 하나같이 어머니를 부러워했다.

“정남어매 니는 그래도 조상 덕으로 터전 지키고 살게 돼서 얼매나 다행이고.”

그들은 애써 어머니의 병을 거론하지 않았다. 천병 만약의 약방문이 환자를 되레 힘들게 함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면 이미 환자의 병이 어떤 결말을 예시하고 있는지 끼리끼리 주고받은 정보로 환히 알고 있음이기도 했다. 그들은 같은 또래로 시집와서 늙어온 이날까지의 일들을 일상적인 이야기 하듯이 주고받았다. 어머니도 제법 웃으며 옛날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들추어내서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우습기도 하고 눈물 나기도 했던 서툴고 철없었던 젊은 시절의 정한. 모두들 끌끌 혀를 차며 우리가 언제 이렇게 늙었나, 인생무상을 순리로 받아들이는 습관적인 한숨으로 나누던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그 많은 이야기 중에 남들로부터 듣는 아버지의 이야기여서 양지의 뇌리 속에 새삼스럽게 각인되는 놀라운 사건도 있었다. 아버지가 아직도 실명한 한쪽 눈의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데 대한 거여서 더욱 그랬다.

“정남 아부지가 요번 일 있고 나서 째보한테 갔지만 빈손으로 돌아왔담서?”

“설마설마 하고 갔는데, 눈물을 머금고 안 왔겄나”

“째보 그 인간이 상촌양반한테 그라모 안되지, 상촌양반 눈이 누 땜에 그리 됐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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