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6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64)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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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5 (264)

어머니는 정말 정남이가 홀로서기에 대한 매운 실천을 하고 있는 줄 인정하고 있었다. 시치미 뗀 양지는 그러마고 했다. 아픈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거짓말인 들 꾸며대지 못하랴 싶었다.

어머니의 의미심장한 뜻을 모르고 그냥 짜증스럽게만 받았던 그 밤의 못된 처신이 더욱 한스럽게 양지를 휘둘렀다.

스스로 불을 질러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한 것 같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혀를 차며 쑥덕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저기 울타리 밑에 이런 게 있네요.”

하며 동네 아이들이 발견한 짐꾸러미를 들고 왔다. 불타서 안 될 물건들로 뭉쳐져 있는 짐이 명자어머니에게 했던 어머니의 약속과 결의를 증거하고 있었다.

양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초라하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를 원망하고 측은하게 여겼던 자신의 오만이 새삼스러운 부끄러움을 몰고 왔다. 감히 누가 누구를 무엇으로 평가하며 얕잡아 보고 연민하며 멸시할 수 있는가. 더구나 결혼도 안 해 본 딸년이 이미 생의 모든 과정을 거쳐 온 인생 고수를 상대로 말이다.

무한정일 병원비와 앞날이 캄캄할 뿐인 암환자를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는 어려움도 뒤섞여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밝고 희망적인 말마저 인색하게 굴었다. 당신의 말대로 그렇게 살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므로 그렇게 살았을 뿐이지 어머니는 결코 미욱한 사람이 아니었다. 높은 곳은 항상 아득하고 자욱한 이내로 형체를 숨기고 있거늘 어째서 다 보았다고, 다 안다고, 관념으로 본 천박한 상식만을 가지고 교만에 찬 멸시를 품어 왔던가.

묵지근하게 내려앉는 상체를 버거운 듯 비스듬히 벽에 기대고 의지한 채 눈감고 있기를 잘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지럽게 오고갔을 상념들이 메모된 문건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어머니는 두려웠을 것이다. 옷을 죄 벗고 갈아입어야하던 낯선 환자복과 불용처분 직전인 물품처럼 삶의 막장에 모인 아픈 사람뿐인 입원실 분위기가 질식할 듯 기막혔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듯 마취된 채 누워서 어렵게만 보이는 외간 남자들에게 나신을 헤뜨려놓아야 할 것도 어머니로서는 마음 가볍게 당할 일이 못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자궁은 그 어렵고 힘든 세상을 버텨 나갈 수 있는 힘을 준 유일한 희망의 원동기 같은 곳 아니던가. 그 든든한 삶의 동반자가 배반의 독을 품고 자신을 해치고 있었던데 대한 절망을 견뎌내기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희망도 없는 구차한 목숨을 더 이어보자는 욕심으로 싹둑싹둑 육신이 저며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가난한 여인네로 살망정 자존심만은 무척 다부지게 지켰던 어머니였다. 남과 다투지 않고 남을 헐뜯지 않으며 현실에 집착해서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 어머니는 그렇게 알뜰히 지켜왔던 자신을 더 이상 연민의 구렁텅이에다 방치해 두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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