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6)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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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66)

물론 부모 복을 타지 못했으니 또래의 남녀들이 누리는 평범하고 복스러운 그런 일상은 단념한 채 살았다 해도, 나이 들고, 돈을 벌고, 의식이 갖춰지면서 제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들조차 제대로 계획하고 실천해 본 일이 없다. 아니 그래야겠다는 생각조차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창녀처럼 헤프게 웃지 못하는 체질이니 비록 야간에서 야간으로의 연속이었지만 숱하게 스쳐 지난 괜찮은 많은 남자 동창들이나 사회 동료들과 마음 앗긴 연애 한 번 못해 본 것은 젖혀 두고라도, 주변머리 없는 늙은이들의 입에 흔히 열린 푸념처럼 먹고 싶은 것 한 가지 입고 싶은 것 한 가지 마음대로 한 것이 없다. 무언가, 대단한 것, 그 지점에 이르러서 그 일을 해내도록까지 인내하며 힘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머리통에 쥐가 나도록 본능을 자제해 왔다. 그런데, 무언가, 그 일, 그 지점이 홀연히 무화되어 버린 허망함 속에 빠져버렸다.

눈만 감으면 꿈을 꾸었다. 검게 탄 육신을 잉걸불 속에서 뒤채고 있는 어머니가 보이는가 하면 개울가에서 천진무구한 모습으로 뛰어 놀던 자신과 남의 집 아이보기로 나선 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인으로 성장한 지금까지의 여러 장면들이 낡은 그림책을 들추듯이 뒤숭숭하게 나타났다가 스러지고는 했다. 어떤 때는 비참하게 죽은 모습까지 목격해야 했던 정남과 유치장에 갇혀서 종달새처럼 걱정 없이 종알거리고 있는 호남이, 언니 성남과 이미지만의 고모, 말만 들은 언양할머니, 명자언니네 할머니로 보이는 삼월이까지 많은 여자들의 이런 저런 모습들에 쫓겨서 길도 없는 곳을 죽을 둥 살 둥 헤매 다녔다. 그렇게 쫓겨 가다 지쳐서 쓰러졌고 뻑적지근한 다리의 아픔에 눈을 뜨면 삭막한 현실이 앞에 놓여 있었다.

간밤에도 수없이 밀려오고 밀려드는 여자들 속에서 쾌남아, 쾌남아, 자신을 부르고 있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양지가 부르며 따라가자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서 어디론가로 멀어져 갔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조언 한 마디라도 들어 놓을 걸 후회하고 있던 양지는 꿈에서도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어머니를 뒤따라 뛰었다. 엄마가 한 마디만 해주면 이제는 위대한 스승의 말씀으로 여기고 주저 없이 실천할 것 같은데 한 마디만, 한 마디만 간절하게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어머니는 바람처럼 가는 길을 멈추지 않았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두고 날기도 하고 뛰기도 했으나 맞춤한 거리는 그대로 아득하여 그녀는 안달했다.

도저히 오금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쳐서 헉헉거리던 그녀는 기어코 어느 사막 같은 곳에서 그만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희미한 시야 속으로 어떤 그림자가 다가왔다. 아가, 가여운 것. 정신을 차려야지, 네 짐이 너무 무겁구나. 어머니의 목소리였으나 곁에서 들리는 소리와는 달리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의 감이 아련하게 멀었다. 그 사이에 까마귀 떼처럼 검은 그림자가 다가와 양지의 머리 위에다 무언가를 깔겨댔다. 뇌수를 파고드는 오싹한 감촉에 양지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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