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4)
  • 경남일보
  • 승인 2016.10.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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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6 (274)

나머지 꽃들을 마저 뽑는 대로 그것들을 태워 버릴 작정을 했다. 국화꽃의 생태가 첫서리와 첫눈 속에서 더욱 그윽해 진다더니 아직 대궁에는 수분이 많아서 쏘시개를 많이 박지 않고는 잘 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이 마르도록 기다릴 만큼 느긋한 마음의 여유도 생겨나지를 않았다. 바람이 있다면 하나하나 정리를 하는 도중 어느 결엔가 새로운 시작의 지표가 마음속에 드러나지 않을까하는 거였다. 불 탄 자리에서 더욱 탐스럽게 새싹이 돋아나듯이 이왕이면 그런 튼튼한 생명력을 이 겨를에 부여받고 싶었다.

어제는 고종오빠와 호남을 면회하고 왔다. 영치금과 사입품을 여러 가지 필요할 듯싶은 것으로 골라 넣어 주려고 하자 얼마 안 있어 나올 거라며 오빠가 가짓수를 줄여 신청을 했다. 호남은 궁지에 몰려 있는 중이면서도 신념에 한 점 티끌도 없는 듯한 꿋꿋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도리어 언니인 양지 걱정을 했다. 고종오빠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건의 전말을 들은 날은 울부짖으면서 몸부림을 쳤다더니 이제는 어지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일 터였다.

“우짤라꼬 이리 정신 못 차리고 있노”

걱정거리가 그것밖에 없는 듯한 단순하기 짝 없는 목소리로 양지를 나무라는데 호남은 꼭 서열이 되 바뀐 듯한 언니노릇이다. 양지는 영어의 몸인 자신의 주제파악도 못하는 호남의 당당함 이 얄미워 보내야할 대답을 무시한 채 궁금한 대로 제 물음만 던졌다.

“주영아빠는? 주영이는?”

“학원가고 출근하고 다 잘 들하고 있다더라. 내가 올 필요 없다는 데도 매일 한 번씩 온다.”

걱정하는 양지보다 당사자인 호남의 천연스러운 대답은 어디 장한 사명을 띤 출장이라도 나와 있는 것 같다.

“전에도 잘살았지만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면서 살아. 불리했던 너를 구명운동까지 해준 동네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도 어차피 남이야. 옛날 같지 않을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돼.”

“알았네! 알았어. 집행유예라는 건 감옥살이만큼 근신해야 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요. 그란께 내 걱정은 하덜들 말고 언니나 잘하시더라고. 몸은 여게 있어도 언니 생각뿐이고 언니 생각하모 잠이 안 온다. 엄마가 언니를 우떻게 생각했는지 아나. 하늘이고 상기둥이다. 언니 이라고 있는 거 보고 엄마가 뭐라 칼낀고 안 싶으나. 우리 엄마 한풀이를 해서라도 언니 니가 정신 채리야 된단 말이다.”

그게 어떻게 나 혼자한테만 기울인 엄마의 정성인고. 양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창살 너머의 호남이 얼굴, 그 더 너머의 흐린 창으로 가려진 허공에다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묵지근하게 어깨가 쳐져 내렸다. 남들 사는 듯이 평범하게도 살지 못하는 주제에 비범하기만을 꿈꾸어 온 허황된 욕망을 호남은 진작 눈치 채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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