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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이 있는 힐링여행] 강진, 다산초당과 영랑생가유흥준이 꼽은 남도답사 1번지, 해답을 찾아서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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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21  22: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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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엔 담쟁이 잎으로 겨울옷을 갈아입은 영랑생가.


◇찬란한 슬픔의 봄

미술사학자인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답사 1번지로 꼽았던 전라남도 강진, 왜 이곳을 남도답사 1번지라고 했을까 하는 화두를 품고 강진을 찾았다. 그러나 강진의 다산초당과 영랑생가를 직접 답사해 보면, 그 화두는 쉽게 풀린다. 무엇보다도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생활한 다산의 삶과 영랑 시인의 시의 혼 속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남도답사 1번지가 이곳이어야 함을 체득하게 된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평생교육원 ‘체험론적 시창작과 힐링’ 강좌 수강생들과 함께 찾은 다산초당과 영랑생가, 참된 학문의 길과 아름다운 시혼(詩魂)과의 만남을 통해 이 땅의 지성인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아름다운 삶인가를 되짚어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기대하면서 힐링여행을 떠났다.

강진읍에 있는 영랑생가부터 찾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은 늘 찾는 이들을 경건하게 했다. 뜰에는 꽃과 잎이 진 모란이 줄기만 선 채 명상에 잠긴 듯하고, 장독대는 예나 지금이나 말없이 탐방객을 맞이해 주었다. 영랑 시인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모란이 피기까지는’ 외 80여 편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60여편이 광복 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 대표시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낭송한 뒤, ‘찬란한 슬픔의 봄’이 담고 있는 의미를 서로 얘기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시인이 간절히 기원했던 광복, 광복을 염원하는 애달픈 심정을 담은 그 봄, 하지만 광복 이후 이 땅의 봄은 따뜻하기보다는 바람과 진눈깨비가 내리는 스산한 봄임을 예견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 기와로 인 다산초당.


◇유배지에서 꽃피운 찬란한 학문

영랑생가 옆에 있는 시문학파기념관을 둘러본 뒤 짱뚱어탕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곧장 다산초당으로 향했다. 다산수련원에서 출발한 일행은 두충나무 숲길을 지나 부드러운 황톳길을 걸어갔다. 수련원에서 다산초당, 백련사로 이어지는 1.5㎞의 다산오솔길은 정약용 남도유배길의 한 구간이다. 평탄한 황톳길을 지나 가파른 숲길로 들어서면 이채로운 길바닥을 만난다. 마치 나무 뿌리로 타일을 깔아놓은 듯한 울퉁불퉁한 바닥은 다산 선생의 삶의 질곡(桎梏)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길섶에 새겨놓은 정호승 시인의 시 ‘뿌리의 길’ 한 부분처럼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나무, 편백나무 숲길을 조금 더 치고 올라가면 다산초당을 만난다. 선생이 강진 유배 18년 중, 10여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를 비롯해 500여권의 저서를 집필한 곳이다. 1801년 신유사옥(천주교도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사건)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다산의 조카사위가 황사영임)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 8년은 보은산방과 제자의 집에서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유배에서 풀려나던 1818년 가을까지 10여 년 동안을 이곳에서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활동을 하였다.

다산의 유배는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지만 우리 겨레나 후학들에겐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다산의 위대한 업적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목민관으로서의 삶의 자세에 대해 역설해 놓은 ‘목민심서’는 오늘날의 위정자들이 머리맡에 두고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할 귀한 책이다. 다산초당은 노후로 인해 붕괴(1936년)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와 다산의 외가 해남윤씨의 도움으로 1957년 지금의 기왓집으로 복원했다. 선생이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 찻물로 쓰던 약천, 차를 끓일 때 쓴 다조, 연못가운데 바다에서 가져온 돌로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4경과 선생이 머무시던 동암과 제자들이 기거한 서암이 있는데, 동암 현판으로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 선생이 직접 쓴 글씨로 ‘시대의 보배 정약용 선생의 산방’이란 의미와 함께 서체의 보배로 추앙받는 추사체의 진수를 보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동암에서 20여m 떨어진 곳에 천일각이 있는데, 다산 선생이 유배생활 중 시름을 달래던 이곳에다 훗날 정각을 지었다고 한다.

 
   
▲ 다산 선생이 직접 돌에다 새긴 글씨 ‘정석’.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고, 저술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크게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과 꿈이 서로 괴리되어 있을 때, 마음은 늘 외롭고 팍팍했을 것이다. 그 외로움을 달래준 사람이 백련사 혜장선사이다. 두 사람은 주역과 茶에 대한 토론, 세상 이야기를 통해 정신적 교유(交遊)를 했다고 한다. 선생은 초당에서 백련사까지 자주 왕래하여 산길을 여셨는데 그 길이 지금의 바스락길이다. 이 오솔길이 다산의 사색코스로써 길 중간에 야생차나무와 수령 600~800년 된 동백나무가 1000여 그루 자생하고 있다. 꽃 진 동백나무 숲을 지나 백련사에 들렀다. 절마다 특색이 있겠지만 백련사에는 물고기등을 달아놓은 게 무척 이채로웠다. 흰색 한지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서 만든 물고기등. 밤낮 눈을 뜬 채 늘 깨어있는 수행자처럼 살아가길 염원하는 마음을 물고기등으로 형상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백련사 동백숲으로 난 하산길로 내려오면서 다산과 혜장 그 깨어있는 삶을 떠올렸다.

 

   
▲ 늘 깨어 있으라는 법어를 전하는 듯한 물고기등.



유홍준 교수가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로 명명한 이유를 다산과 영랑의 삶에서 답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보다는 파당 싸움으로 어지러웠던 조선을 지켜온 ‘깨어있는 정신’이 오롯이 배어 있는 다산의 유배지, 일제시대 수많은 문학예술가들이 친일 행위로 인해 그들의 영혼이 훼손당한 것과는 달리 끝까지 겨레와 시의 혼을 지킨 영랑 시인의 삶의 자취가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일 것이다. 참되고 바른 정신이 유적을 더욱 가치 있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마음속에 깃든 아픔들을 씻어내는 것도 하나의 힐링이 될 수 있지만, 지금처럼 혼탁하고 가치관이 흐려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삶의 열쇠를 얻는 것도 훌륭한 힐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박종현(시인·경남과기대 청담사상연구소 연구원)



다산 선생과 혜장 선사가 교유했던 바스락길
다산 선생과 혜장 선사가 교유했던 바스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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