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6)
  • 경남일보
  • 승인 2016.11.29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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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6)

탐스럽게 많이 매달려있는 빨간 망개열매를 바라보며 인적 드문 산골의 정취를 음미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투두둑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양지가 가려는 언덕 저쪽에서 긴자루가 달린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를 든 노파 하나가 뭐라고 혼자 소리를 구시렁거리며 잰걸음 질을 하고 있었다.

“여 있었시모, 검은 옷을 더풀더풀하게 입은 여자 하나 이리 지내 가는 거 몬 봤소? 우아래로 꺼먼 옷을 입었는디.”

또 사람을 찾는다. 과연 그녀는 누구인가. 무슨 이유로 저렇게 여러 사람이 찾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느라 봤다 안 봤다 답을 할 겨를도 없는 사이 노파는 양지를 지나쳐 공양간 뒤의 비탈길을 빠르게 올라갔다.

추운날일수록 햇살은 양지쪽으로만 모여드는 것 같다. 음지의 나무 밑에는 녹다만 눈이 아직도 무더기무더기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띄건만 샘물 주위에는 모락모락 김이라도 피워 올릴 듯 햇볕이 따스하게 모여들어 있었다. 사람이 사용하는 우물이라는 표식을 낸 듯 콩나물이 몇 개 흩어져 있고 솥을 부시는데 사용한 듯 수세미며 손을 씻은 비누 등이 시멘트 칠 된 축대 위에 놓여있다. 만약 산길을 잃고 헤매던 나그네가 이것을 발견한다면 머잖은 곳에 있을 인가를 느끼며 안도할 수 있는 충분히 정감 있는 풍경이기도 했다.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 (三日修心千財寶 百年貪物日朝塵)

장승모양의 말뚝에 있는 글의 뜻을 해석하느라 짧은 한자 실력을 동원하다 그냥 생각을 흩어버렸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저 그렇다는 말일 뿐.

‘쾌남아, 옆에 아지매한테 언내는 주고 니도 퍼뜩 옷 벗고 온 내이. 어서어서 우리 맞고 자리 피끼 조야제’

백중날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부스럼 많은 딸을 데리고 와서 뽀독뽀독 살이 아프게 피부를 문지르고 딱딱 이가 맞게 찬물을 끼얹었다. 양지는 새삼스러운 추억으로 온 몸에 있던 부스럼의 뿌리가 되살아나는 듯 공연히 근질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물은 자루 달린 바가지가 필요할 만큼 저 밑에 고여 있었다. 우물가라긴 해도 질퍽하게 수채물이 흐를 것도 없이 개울은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래도 보이지 않는 수맥이 땅심을 적시다가 이곳에서 솟구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양지는 우물 턱에 놓여있는 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이정님’이라는 이름이 쓰인 자루가 긴 바가지였다. 무릎을 굽혀 웅덩이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미미한 이끼 냄새와 함께 고여 있던 냉기가 얼굴을 감쌌다. 음미해 보았지만 옛 맛인지 아닌지 확실히 각인되어있는 물맛은 없었다.

정화수 그릇을 깨끗이 씻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양지는 물을 담지 않고 빈 그릇의 물기를 뿌린 뒤 옷깃으로 닦았다. 산신각 바위틈에다 다시 정화수를 올릴 생각을 접었다. 누가 다시 와서 빈 그릇에 채워진 먼지를 씻고 깨끗한 새물을 담아 놓으랴. 보는 사람 누구에게 건 좋지 않은 상상으로 전달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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