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88)
접근을 불허하며 하얗게 드러내는 증오의 이빨이 상처 입은 맹수 이상의 위협을 가해왔다. 그렇지만 양지는 어디서 비롯된 지도 모르는 자신감으로 낯선 사람에 대한 예의도 접어 치운 여자를 바로 보았다.
“아니요, 저도 얼마 전에 엄청나게 큰일을 겪은 사람이라 어쩌면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을 것 같아요.”
좀체 곁을 줄 것 같지 않던 여자가 다소 비아냥스런 음성이지만 곧바로 물음을 던졌다.
“흥. 그럼 너는 뭣 때문에 사는 지 답할 수 있어?”
“글쎄, 아직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은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선뜻 할 수 없지만…….”
“그렇겠지 풍족하게 돈 쓰면서 사내들 뒷바라지나 하는 착실한 아내, 뭐 그딴 것들에 만족하면서 자기 존재나 의지 따위는 까마득히 상실한 채 있는 대로 쓰고 먹고 꾸미고 쳐 자빠져 뒹군 멍청한 그딴 쪽이겠지.”
양지의 연령대를 짐작한 거침없는 입앓이다. 양지는 뜻밖의 여자로부터 판매를 맞은 듯한 놀라움으로 어찔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모든 여자들의 로망을 부인할 어떤 철학도 사상도 정립 못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 쪽은 지금 그 일과 어떤 상관인가요?”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얼굴에 실죽 어려 있던 비웃음을 지우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여자가 쏟아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났던 흔적을 호적장부에만 남기고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지. 제길, 그런데 가족이 뭔데 부모형제가 뭔데 나를 밥 삼아 저희들 배부를 궁리만 하느냐고.”
“가족이니까. 나도 이전까지는 그쪽과 비슷한 생각으로 살았는데 삶과 죽음 가운데서 요즘 많은 깨달음을 얻은바 그들도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이유? 흥, 곁다리로 얻어먹을 국물, 콩고물 그런 아귀 같은 것 말고 뭐겠어. 내가 작업하는데 손톱만한 것 하나도 투자 안한 것들이 내 명예에 편승해서 덤으로 내 존재까지 탈취하는데 내가 당할 것 같애? 그것도 도매금으로.”
그제야 양지는 여자의 옷에 여기저기 묻어있는 물감의 흔적을 발견했다.
“예술가들 특유의 예민한 감성 때문에 상대방의 호의를 너무 오해하고 비꼬는 건 아닌가요?”
“인간은 절대 고독 속에 혼자 놓인 개체야. 주위 환경에 매몰되는 순간 휘둘리게 되는 혼동과 갈등에 맞설만한 뭐가 있어? 난 그런 엉터리 위선이 싫어. 생의 진정한 가치가 무언지도 모르는 것들이 돈이면 단 줄 알고.”
양지는 돌연 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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