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 앞 마당에 수령이 200년 쯤 되는 팽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청학동으로 가는 입구, 지리산 둘레길 10코스인 하동호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여름 내내 매미와 새들이 무성한 나뭇잎의 그늘을 즐기며 놀았던 그 고목에는 이제 앙상한 가지만 남아 겨울 찬바람을 맞고 있다. 옷을 벗어버린 이 고목의 투박한 껍질은 눈가에 주름이 깊게 잡히고 손등이 거칠어져 벌써 노년이 된 나를 닮았다. 오랜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 나는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이 나무 위에 올라 노래 부르고 열매를 따 먹었던 그때를 그리워했다. 나는 한평생을 침묵으로 인연을 맺은 이 겨울나무 친구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은퇴를 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온 지금도 옛 친구로서의 따뜻한 정을 잊지 않고 침묵의 소리로 유익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으로 세상은 어지럽고 국민들은 충격을 받아 탄식하며 한숨을 쉬고 있다. 여기저기서 설왕설래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광경을 보노라면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중국의 왕부가 지은 ‘잠부론’에는 일견폐성 백견폐성(一犬吠形 百犬吠聲)이란 말이 나온다. “한 마리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니 수많은 개가 덩달아 따라 짖네.”
겨울나무가 행하는 대화의 기본 스타일은 사물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삶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가슴으로 전하는 이야기는 탐욕보다는 배려와 감사와 같은 따뜻한 언어다.
겨울나무는 말한다.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는 영성의 눈을 단련시키는 능력이라고….
남은 나의 인생은 마음 깊숙이 자리한 욕심을 떨치고 겨울나무가 품어내는 향기로운 침묵의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겨울나무만큼 내 인생도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다.
양강석(청학사랑방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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