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95)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95)
  • 경남일보
  • 승인 2016.11.2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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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7 (295)

뜻이 안 맞는 남편과 미워하며 헤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어린 강아지만도 자생능력이 없는 누운쟁이를 내버려두고 가는 어미의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또 내게 과연 그런 노여움을 품을 자격이나 있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늙은 아버지의 아들인 핏덩이가 있었지만 한 번도 호의적으로 떠올려 본적이 없었고, 차라리 없는 것보다 나은 감정으로 바라본 적 없는 정남의 어린 딸이 상기되었다.

“다 됐으면 좀 쉴래?”

텔레비전을 켜주며 오빠가 말했다. 바람도 쐴 겸이라고 오빠는 말했는데 은연중 대단한 기대라도 하고 있었나 보다. 양지는 고작 이 따위 단순한 일로 자신의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 싱겁고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도울 일 더 없으면 가고 싶어요.”

“조금 있다가 같이 가. 나도 곧 가야 된 깨.”

양지는 따뜻한 이불 밑에다 손을 밀어 넣으며 앉았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한 남자노인이 밥을 먹고 있다. 며느리인 듯한 여자는 늙은이가 미워서 눈총을 주는데 그것도 모르는 늙은이는 맛있게 꼭꼭 씹어서 음식을 먹는 일에만 열심이다. 오직 이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단순하고 억척스러운 표정으로 이것저것 가려서 먹는 망설임도 없이 왕성한 식욕이 화면을 꽉 채운다. 늙은이의 그런 본능적인 먹성을 역겨워하는 젊은 며느리의 찌푸린 얼굴이 괜히 밉살스럽게 보였다.

“동생”

어쩐지 늙은이가 측은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오빠가 양지를 불렀다. 끝이 약간 말려 올라가는 은밀한 음성이 무엇인가 같이 보기를 원하고 있다. 얼른 오빠 곁으로 다가간 양지는 오빠의 시선이 미치는 방향으로 창을 내다봤다. 저 멀리 과수원 초입에 택시 한 대가 와 있었다.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굼뜬 동작으로 택시 기사의 도움을 받으며 짐을 챙겨 들고 있었다.

“그 사람이 오는구나.”

오빠가 아연 긴장해진 눈길로 양지를 바라보았다. 양지도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라움으로 커진 양지의 눈이 오빠를 쏘아보았다. 그 사이, 큰 짐을 굴리며 집으로 가는 쇠똥구리처럼 남자의 정체는 식별 가능한 지역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외숙님이나 동생을 위해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정말 없었어.”

그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순간 양지는 이제까지 예사롭게 들은 오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실은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기가 막혔다. 정말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상상조차도 못했었단 말인가. 돌아선 양지의 등으로 오빠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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