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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06)<166>의로운 시인 윤동주와 경남의 인연(7)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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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9  2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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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윤동주의 유고시가 실리고 사흘 후 1947년 2월 16일이 윤동주 2주기가 되었다. 이날 정병욱, 강처중 등 윤동주의 친지들 30여명이 모여 서울 소공동 플라워회관에서 추모회를 가졌다. 송우혜의 ‘윤동주평전’에 의하면 선배시인 정지용도 참석했고 연전 동창 유영(진주의 이명길 교수의 인척), 김삼불 등이 참석하여 시 낭송과 작품세계에 대해 논했다. 이로부터 1년 뒤 1948년 1월 30일에 초간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연희전문 최현배 선생의 장남이 경영하던 정음사에서 간행되어 나왔다.

이 초간본 시집은 정병욱이 보관했던 자선시집 원고 19편과 친구 강처중이 보관하고 있던 시고 12편을 합한 31편이 실려 있다. 윤동주가 일본 릿교대학 6개월에 썼던 5편을 강처중에게 필사하여 보냈는데 그것이 강처중의 손으로 편집된 초간 시집에 포함된 것이다. 그 나머지는 유고들 중에서 <밤>, <참회록> 등이 보태졌다.

이 시집 서문은 윤동주가 존경해 마지 않던 정지용이 썼다. 이 서문에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와와의 대화를 기록해 두었다. “정지용: 연전을 마치고 동지사대학에 가기는 몇 살이었던고?” “윤일주: 스물 여섯적입니다.” “지용: 무슨 연애 같은 것이나 있었나?” “일주: 하도 말이 없어서 모릅니다.” “지용: 술은?” “일주: 먹는 것 못보았습니다.” “지용: 담배는” “일주: 집에 와서는 어른들 때문에 피우는 것 못 보았습니다.” “지용: 인색하진 않았나?” “일주: 누가 달라면 책이나 샤쓰나 거져 줍데다.” “지용: 공부는?” “책을 보다가도 집에서나 남이 원하면 시간까지도 아끼지 않습데다.”

“지용: 심술心術은?” “일주: 순하디 순하였습니다.” “지용: 몸은?” “일주: 중학때 축구선수였습니다.” “지용: 주책은?” “남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도 함부로 속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정지용은 윤일주와의 문답 내용을 적고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했던 것이 아니겠던가. 무시 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 강점기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정지용은 이어서 말한다.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故土) 간도에 누워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윤동주를 기렸다. 정지용이 윤동주를 일러 “동지 섣달에 피는 꽃과 같다”고 했다. 천혜의 감각파 정지용의 표현다운 구절이다. 그리고 동주의 ‘뼈’가 강한 것에 대해 칭찬해 마지 않았다.

강처중은 시집 발문에서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않았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그는 적국의 감옥에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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