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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07)<167>의로운 시인 윤동주와 경남의 인연(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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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1.05  23: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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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1948년 1월 30일에 정음사 간행으로 발간되었다. 알려진 대로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 있던 연희전문시절 기숙사 3총사 중 한 사람인 강처중이 발간 업무를 담당했다. 이때 정병욱은 연희전문을 나와 학병에 끌려 갔다가 돌아와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편입하여 다니고 있었다. 동주의 3주기는 시집이 발간된 뒤 17일후인 1948년 2월 16일이었다.

시집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실렸다. 그 발문 내용을 좀 보고자 한다.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차 있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나?’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이 마주 앉아 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산이든 들이든 강 가까이든 아무런 때 아무데를 끌어도 선듯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그는 말이 없이 묵묵히 걸었고 항상 그의 얼굴은 침울하였다.

가끔 그러다가 외마디 비통한 고함을 잘 질렀다. “아-” 하고 나오는 외마디 소리, 그것은 언제나 친구들의 마음에 알지 못할 울분을 주었다.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곧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사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들이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런 동주도 친구들에게 곧이 거부하는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동주 자네 시(詩) 여기를 좀 고치면 어떤가”하는 데 대하여 그는 응하여 주는 때가 없었다. 조용히 열흘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곰곰이 생각하여서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때까지는 누구에게도 그 시를 보이지를 않는다. 이미 보여주는 때는 흠이 없는 하나의 옥(玉)이다. 지나치게 그는 겸허온순하였건만 자기 시만은 양보하지를 안했다.

그는 간도에서 나고 일본 복강에서 죽었다. 이역에서 나고 갔건만 무던히 조국을 사랑하고 우리말을 좋아하더니 ?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아잇적 동무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간 채 마침내 모진 악형에 쓸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동주와 몽규가 연전을 마치고 경도에 가서 대학생 노릇하던 중도의 일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운명했지요. 짐작컨대 그 소리가 마치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이 말은 동주의 최후를 감시하던 일인 간수가 그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유족에게 전해 준 말이다.

송희복 진주교대 교수는 간수가 들은 외마디 소리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간고꾸만세, 간고꾸 만세”라고 외쳤던 것일 것이라 추정했다. 이 말은 ‘조선독립만세’에 길들여진 일인들에게는 ‘간고꾸’는 낯선 발음이라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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