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9 (330)
아버지의 입에서 다시 음산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자의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양지의 전신을 감고 돌았다. 노랫가락처럼 흥얼거리는 아버지의 독백이 말리는 양지의 말을 추임새삼아 다시 격렬하게 변해갔다.
“전 지금 떠납니다.”
양지는 어느 결엔가 자신의 어미가 통상적인 표준어로 바뀌어 있음을 의식했다. 이 곳 고향에서는 어른들에게 쓰는 말끝에 ‘예’ 나 ‘더’가 아니면 존댓말이 아닌 반말로 들리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으로 주의해 왔던 터였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던 아버지가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옮겨 들며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문 담배에다 불을 붙이고는 꺾듯이 고개를 숙이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아버지는 항상 그런 식으로 독선적이었죠. 하지만 나는 아버지처럼 늙지 않았어요. 나는 내 인생 속에서 아버지처럼 결코 환각 같은 건 만나지 않을 겁니더. 어서 가서 그 죄 없는 어린애나 혼자 두지 말고 돌보이소.”
“아아? 니가 그걸 걱정하다니 참 놀랍네.”
납득 못하겠는 빤한 눈길로 양지를 건너다보던 아버지가 마른 풀 위에 떨어져 있는 어린애의 사진을 길게 뻗은 손으로 주워들고는 새겨보듯 한 참을 들여다보더니 두 번 세 번 꼭꼭 눌러서 속이 보이지 않게 접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몇 발자국 옆으로 옮겨서 판 구덩이에다 소중한 물건처럼 따독따독 눌러 묻었다. 이를 지켜보는 양지를 향해 히히히,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뱉어낸 말은 뜻밖이었다.
“내 핏줄 아이라꼬 고백함서 지 에미가 찾아갔다. 형편지사 보믄 칙은해서, 돈은 모진 강도 만내서 목숨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라 치기로 했고.”
허. 이건 정말 환각인가. 아버지의 말대로 한 번 더럽게 꾼 낮꿈인가. 뻥해진 심정인 양지의 뇌리 속으로 아버지가 소원성취 했다고, 호남이 소리친 이후로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던 지난날의 기억들이 떼구름처럼 흘러갔다.
절연을 선언하는 과감한 동작으로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렸으나 뭔지 모를 혼란함이 덮씌워졌다. 눈 쌓인 내리막길을 나뭇가지를 잡고 내려오는 동안 그녀는 계속 미끄러졌다. 아버지의 외눈이 자꾸 앞을 가렸다. ‘내가 아무리 남의 눈이라도 해옇자캐도 이녘 자식들 손으로 해주기 전에는 절대 안한다꼬 뻗댔다. 어느 천 년에 아들이 나서 장성해 갖고 그 원한을 갚아줄까 설득해도 꼭 안 듣더라. 그 고집을 누가 막을 것고’
저작권자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