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60)
응급실. 출구의 빨간 글씨가 괜스레 지난 일을 상기시키며 으스스하게 한다. 가슴까지 올라와 있는 물색담요를 끌어올리며 양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심정으로 긴 호흡을 했다. 양지가 깨어난 것을 보고 저쪽으로 달려갔던 호남이 아직 앳되어 보이는 여의사 하나를 데리고 왔다.
“기분이 좀 어떠세요?”
의사는 양지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고 목구멍을 들여다보더니 곁에 있는 간호사에게 눈짓을 한다. 간호사는 양지의 혈압을 재고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맥박을 헤아린다.
“이제 입원실로 가셔도 되겠는데요.”
입원실? 양지가 의사를 올려다보자 호남이 나섰다.
호남은 짐짓 진저리 치는 표정을 지으며 양지가 할 말을 막았다. 내가 그렇게 중병에 걸렸던가? 양지는 다시 순간적인 열패감에 빠졌다. 옆으로 봐도 위를 봐도 온통 하얀 벽뿐이다. 극복하고 초월하고자 했던 의지는 등불처럼 항상 켜놓고 살았건만 다시 이렇게 갇힌 신세가 됐다.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무력한 자신을 인정하기 괴로웠다.
양지는 절망의 한 소실점까지 타의에 의해서 밀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호남은 죽음 직전에서 언니를 건져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연신 징징거리면서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양지의 얼굴과 손발을 닦는다. 제 앞에 누워있는 사람이 피붙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의식처럼 놀리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진지하기도 하다. 어떻게 그 지경이 되도록 자신의 신체에 관한 것까지 무방비 상태로 지냈느냐고 마치 손위처럼 나무라기도 하면서.
양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웃음을 지으며 호남의 손을 잡았다.
“걱정 안 해도 돼. 전에도 더러 그런 적 있었어. 신경이 피로하고 무리를 하면 그런 증세가 왔어.”
“누구랑 똑같은 소리하네. 내 병은 내가 안다, 그 할마시도 그라더마…. 사람이 우찌 그리 다 독 하노. 마아 아무 소리 말고 있어라. 언니마저 떠나가모 나는 누구랑 의지해서 사노, 참말 따라서 죽어삐까 별 생각 다했다.”
살고 싶다거나 죽음이 두렵다거나 그런 말 이전에 의사의 추측성 소견이라도 들어야 이 침잠의 늪에서 출구를 찾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의례적인 관심만을 보일 뿐 정신적으로 한 인간이 추락해 있는 절망의 늪에 대해서는 별무 관심이다.
복병에 기습을 당한 것 같은 충격은 이제까지의 어떤 물리적인 불이익보다 양지를 더 허탈하게 만들었다.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하고 노천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지금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죽음은 가까이 있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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