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6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64)
  • 경남일보
  • 승인 2017.03.2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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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21 (364)

“언니야, 와 나와 있노. 춘 데 옷이나 좀 걸치고 나오지.”

가방을 양손에다 들고 청바지 입은 다리를 남자처럼 벌리고 어기적어기적 다가오는 여자가 호남이었다.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음성도 천연스럽다. 즐거움이 지천인 듯 환하게 피어난 얼굴에 너스레를 한없이 늘어놓을 요량으로 흔들어대는 몸뚱이가 온통 익살 투성이다.

저 천연스러움을 그대로 두면 아무런 각성도 없이 또 무슨 큰일을 저지를 지도 몰라. 울컥 미움이 생긴 양지는 마주 일어서며 호남의 앞섶을 낚아채듯이 잡았다.

“너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래 알았어. 지금 대평 가서 언니 니 짐 갖고 오는데 참말 빨간 깃발이 주욱 꽂혀 있는 거 있재. 포클레인도 몇 대기하고 있었어.”

잇대는 호남의 말을 무시하고 양지는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밖으로 나가.”

밖으로? 병실 쪽으로 앞서 가던 호남이 양지의 기색을 살피며 반문을 했다.

“알았어. 덮쳐 입을 거라도 갖고 와서.”

주의 깊지 못한 호남은 바람이라도 쐬고 싶다는 것으로 알았는지 가져 온 겉옷을 밝은 얼굴로 양지에게 걸쳐주면서 해맑게 되살아난 음성으로 먼저 말을 걸었다.

“사람 심리 참 이상한 거 있재? 내 못 먹을 밥에 재 뿌린다카는 심리가 어떤 긴지 알 것 같더라니까.”

적당히 앉을 자리를 찾자 호남은 우정 팔짱을 끼고 들여다보며 종알종알 늘어놓을 말의 서두를 잡았다. 마음에 낀 앙금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양지는 답답함이 맺힌 눈길로 호남을 노려보았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니?”

“아버지나 오빠도 아직 아무 말 안 하재? 언니 맘 상할 까봐 그 쪽 말은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기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지금.”

“기철이가 언니 델꼬 왔다 안카더나. 우짜든 여어 좀 앉아서 내 말 들어봐.”

측량하는데 다녀오던 기철이 양지 자신을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겨왔다던 호남의 말을 들었던 듯도 했다.

측량. 양지는 풀죽은 마음으로 무거워지는 어깨를 지탱하기 위해 아무 데나 벽을 잡고 뻗은 팔위에다 이마를 괴었다. 기철네들이 중장비를 몰고 와서 터를 고르는 곳에 붉게 속살을 드러내고 파헤쳐지는 집터가 눈앞에 드러났다. 명자네의 성공은 양지네의 몰락을 짓밟고 현대식 풍요의 어떤 웅대함을 나타낼 것인가.

언니가 제 이야기를 다소곳 들어줄 심산인 것으로 알았던지 호남은 침방울을 튀기며 담아 둔 내용들을 급한 마음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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